빼빼로데이 (1)
엘리베이터 문이 막 닫히려다 다시 열렸다. 그 순간 한 여학생이 들어오면서 눈이 마주쳤다. 낯익은 얼굴이다. 갑자기 가슴이 뛴다. 초등학교 때 전교 회장이었던 은영이다. 아는 척하고 싶은데 은영이가 바로 돌아선다. 이렇게 만나다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거지. 얼굴도 화끈거리는 것 같고.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았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자, 다시 은영이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목덜미 위로 가지런한 단발머리, 어깨에 멘 옅은 분홍색 가방이 교복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할 때, 은은한 화장품 향이 코를 자극했다. 익숙한 향이다. 생각해 보니 누나가 쓰는 화장품과 같은 모양이다.
“7층입니다.” 하는 안내 음성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은영이가 학원 복도로 걸어가더니 오른쪽 세 번째 영어 강의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맞은편 복도 맨 끝 쪽 맞은편 끝 강의실로 들어갔다.
***
중 3인 누나와 나를 위해 엄마는 예고했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부동산 사무실에서 연락이 오자 평창동 빌라를 세놓고 대치동 학원가와 가까운 개포동으로 이사한 것이다. 그것도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 날. 중 3인 누나와 5학년이었던 나는 하필이면 이런 날 이냐고 투덜댔다. 우리는 그런 엄마가 얄미웠다.
해가 바뀌었다. 전교 어린이회장 선거 때였다. 한눈에 들어온 여자애가 있었다. 회장 후보였던 은영이다. 같은 반 친구들 말에 따르면 은영이는 소문난 ‘얼짱’에 공부도 인기도 ‘짱’인 아이라고 했다. 예상대로 은영이는 회장이 되었다. 물론 나도 찍었다. 그때부터 은영이가 내 마음속에 들어와 별이 되었다. 나는 밤마다 그 별을 만났다.
쉬는 시간이 되면 나는 일부러 복도에 나와 서성거렸다. 혹시 은영이가 교실 밖으로 나오거나 지나가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5반 교실을 몰래 엿보거나 기웃거리는 버릇까지 생겼다. 교실 문이 열려 있지 않으면 창문 너머로 봐야 하는데 그때마다 까치발을 들어서 힘들었다.
점심시간 때 운동장에 나가면 은영이가 노는 곳을 찾아 주변을 맴돌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몰래 지켜보다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얼른 교실로 돌아왔다. 집에 가는 길에 말이라도 붙여 보려고 기다렸다. 하지만 은영이 주변에는 항상 같이 다니는 또래 친구들을 많이 몰고 다녔다. 거기에 끼고 싶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 걱정이 밀려왔다. 같은 학교에 배정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밤마다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은영이는 D 중학교, 나는 K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한동안 우울한 마음을 안고 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렇게 눈앞에 어른거리던 은영이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같은 또래 여학생을 보면 문득문득 예쁜 보조개가 선명한 은영이가 생각났다.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보고도 싶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누나가 고1이 되자 엄마는 확 달라졌다. 누나는 학원에서 치르는 Level Test를 치른 후에 의대 준비반에 등록했다. 엄마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2학년 2학기가 시작되자, 나는 원어민 강사가 있는 회화 전문 학원까지 다녀야 했다. 엄마를 이길 수가 없다. 학원에 다니는 애들도 대부분 비슷한 처지였다. 불만이지만 엄마는 항상 이게 다 누나와 나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런 엄마에게 고마운 게 딱 하나 있다. 덕분에 은영이를 다시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어학원에 다니지 않았으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개포동으로 이사 온 거나, 학원에 다니게 된 것 모두가 엄마의 극성스러운 교육열 때문이지만 어쨌든 엄마 덕분인 건 분명하다.
학교에 가면 학원 갈 시간이 기다려진다. 그런데 고민이다.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할지 답답하다. 문제는 용기가 없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소심한 내 성격이 문제다. 왜 은영이에게 말 붙이는 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친구들을 보면 여자애들하고 말도 잘하는데…. 나도 모르게 애만 태우는 날이 길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