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수채화
밤하늘에 내려오는 별들이 빛나는 순간은 밤이 아닙니다. 낮입니다. 어둠 속에서 별이 풍경이 되고 그림이 될 수 없거든요. 단지 별은 초롱초롱 반짝일 뿐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별이 주는 신비로움은 우리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도록 응원해 주는 친구가 되어주고 영혼의 힐-링이 되어주는 건 영원할 겁니다.
가슴에 간직하고 싶은 사랑은 변치 않지만 그걸 그림으로 그려내는 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을에 그려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가을 호숫가로 나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냥 호수가 아니라 별들이 내려앉아 울긋불긋 물들인 호숫가여야 합니다. 그래야 쉽게 가을 수채화를 그릴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물감, 붓, 화선지같은 준비물도 필요 없습니다.
가을빛을 머금고 별빛이 변한 온갖 단풍잎을 눈에 담고 또 담아도 한 폭의 그림입니다. 그냥 갖고 있는 스마트 폰을 꺼내 호수에 내려 앉은 물빛을 담아내면 그 자체가 수채화가 됩니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화가가 부럽지 않습니다. 아주 쉽게 아름다운 수채화 한 폭을 그냥 물에서 건져내면 되니까요.
빛이 물을 만나 어우러져 물감이 되어 주면 순식간에 그림을 그려냅니다. 화가의 붓을 빌리지 않더라도 부드러운 햇살이 붓이 되어주거든요. 나는 그걸 렌즈를 통해 그대로 담아내고, 그걸 다시 컴퓨터 자판에 Ctrl+C와 Ctrl+V를 이용해 붙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듯 가을엔 누구나 쉽게 수채화를 그려낼 수 있는 화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에 탄성을 자아내는 건 쉬운데 그걸 마음에 담아 그림으로 그려내는 건 화가가 아닌 이상 어렵습니다. 아무리 마음속에 아름다운 별빛을 간직하고 있더라도,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지니고 있더라도, 막상 붓으로 이것저것 물감을 섞어 그림을 그려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신으로부터 재능을 부여받지 않은 이상.
호수가 담아내는 가을 수채화는 시간이 걸립니다. 밤마다 별이 하나둘 가을 잎에 떨어져 색으로 물들이고 그들만의 속삭임을 이야기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 이야기가 빨갛고 노랗게 스며들려면 긴긴밤 사랑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가을의 전설이 한 폭의 그림이 될 때까지는 잔잔한 바람과 부드러운 햇살이 도와주어야 가능합니다.
원래 수채화란 게 물감을 물에 풀어 색의 농염을 짙게 또는 옅게 만들어 화폭에 옮기듯 별빛이 가을 잎에 물드는 것도 그 농도가 빛과 바람에 따라 달라야 아름다운 그림이 될 겁니다. 그걸 가을빛과 호수의 물이 조화롭게 담아내는 재주가 남다른 듯합니다. 적어도 화가 못지않게 수채화를 그려내는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수에 내려앉는 가을 풍경이 수채화처럼 보이는 건 단순히 가을이라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이 담아내는 감성적 감각이나 예술적 표현력이 남다르기에 가능할 겁니다. 물은 어떤 물감이든 그 독특한 색과 질감을 나타낼 수 있도록 자신의 정체성을 희생하면서 배려해 줍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수채화가 그려지지 않잖아요.
수채화는 물이 자신의 모든 걸 끌어 안으며 물감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거죠. 수채화의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드러내지 않고 작품의 조연이 되어 그 작품이 빛나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세상은 누구나 주연을 하려 달려들죠. 과연 그래야만 행복한 삶인지 모르겠습니다. 진정 빛나는 주인공은 물감이 아니라 물임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