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11장의 사진으로 표현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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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다는 말은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달콤한 말입니다. 하지만, 은퇴와 관련해 생각하면 반대일 겁니다. 퇴직한 친구들을 보면 쉬는 걸 참 힘들어합니다. 한마디로 놀 줄 모르는 거죠. 어차피 누구나 때가 되면 현역에서 물러나야 하잖아요. 공짜로 주어진 인생입니다. 누리지 못하면 슬프죠. 그래서 겨울바다 구경하러 아내와 같이 나섰습니다. 차가운 바닷가에 조그만 배 한 척이 눈에 보였습니다. 현역에서 물러나 쉬고 있는 것처럼 평화로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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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빌었습니다. 번번이 신춘문예 도전에 떨어졌거든요. 욕심인 거 잘 압니다. 그래도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어쩌다 글을 쓰게 되었죠. 취미로 시작한 사진과 글쓰기가 일상화되다 보니 이왕이면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사실 글과 문학에 관한 한 문외한입니다. 배운 적도 없죠. 어설프게 인터넷을 통해 소설작법을 읽어 본 게 전부이니까요. 창작의 길이 고통이라지만, 글 쓰는 게 즐겁습니다. 어쨌든 달님이라도 도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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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애호가 사이에 성지라 불릴 만큼 유명한 곳입니다. 나도 언젠가 찍어봐야 했던 곳입니다. 항상 마음에만 머물렀던 곳이죠. 집에서 너무 멀거든요. 해마다 3월이면 가봐야지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 같지 않더군요. 기필코 올해는 가봐야지, 마음먹고 새벽잠을 설치며 내달렸습니다. 도착하니 벌써 좋은 자리는 사람들로 꽉 찼더군요. 어쩔 수 없이 비탈진 곳에 엉거주춤 자세로 셔터를 눌렀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3월이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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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시즌이면 명소마다 상춘객들로 넘칩니다. 꽃보다 사람구경을 하는 셈이죠. 벚꽃이 눈처럼 날리는 걸 보고 환호하죠. 좋긴한데 그럴듯한 벚꽃엔딩 풍경을 사진에 담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4월 내내 벚꽃사진을 찍으러 다니며 안타까웠죠. 말 그대로 벚꽃엔딩에 걸맞은 사진을 찍고 싶었거던요. 그러다 찾은 곳이 서산한우목장이었습니다. 사유지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마침내 마음에 드는 벚꽃엔딩을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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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리 축제가 한창인 고창 학원 농장입니다. 봄햇살을 받은 봄바람이 보리밭 사이로 '휘-익' 불어댑니다. 넘실대는 보리밭이 은빛처럼 반짝입니다. 일렁이는 초록물결이 바다처럼 잔잔한 파도를 만들어 냅니다.
'쏴~악 스르르, 쏴~악 스르르'
아, 이런 게 힐~링인가. 바람이 이처럼 아름답게 들렸던 기억이 없습니다. 신록의 계절이 실감 납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곳 청보리밭만은 힐-링의 5월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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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도 너무 덥습니다. 6월인데 한낮에는 30도를 오르내립니다. 사진을 찍겠다고 꽃밭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이나 지났습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지,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사진이 좋다지만, 뙤약볕 아래에서 내가 지금 뭐 하는 걸까? 좋게 말하면 열정일 겁니다. 그늘막에 가서 쉬면 그만인데, 그게 잘 안됩니다. 더 멋진 사진을 찍고 싶은 욕망 때문이죠. 나 자신이 탐욕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6월이었습니다. 도대체 사진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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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할 때가 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죠. 재미있는 소설을 읽을 때처럼, 사진을 찍을 때도 그렇습니다. 7월이면 연꽃이 한창입니다. 여기저기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일벌들이 꿀을 따러 온 겁니다. 녀석들이 꽃에 들어오면 데이트를 즐기는 건지 한참 동안 머무릅니다.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꽃 안에 머무르고 있는 녀석에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연신 누르죠. 나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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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시작한 지 1년 4개월째, 초심을 잃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회수나 구독자 수를 의식하기 시작한 겁니다. 시작할 땐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러다 어느 날 접한 단어가 '관종'이었습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죠. 알고 보니 타인에게 관심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사실 '나만의 놀이터'라 생각하고 시작했습니다. 사진과 글쓰기를 하니까, 그걸 포스팅하면 되겠다 싶었거든요. 다시 다짐해 봅니다. 처음 시작 그마음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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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도 한철이다. 많이 들어본 말입니다. 누구나 인생의 전성기가 있습니다. 몇년전 명예퇴직을 하면서 아, 나도 이젠 인생의 전성기가 다 지났구나 생각했습니다. 순간 삶이 허무하고 서글퍼지더군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사회생활의 종착역에서 느낀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전성기는 지금부터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상의 구속에서 벗어나 무한자유를 얻었거든요.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껏. 그렇게 생각하고 은퇴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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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오릅니다. 저마다 이유가 있죠. 성취감이든, 쾌감이든, 취미든, 건강을 위해서든. 사진을 좋아하는 나는 단순합니다. 좋은 경치를 카메라에 담으려고 오릅니다. 가을은 단풍과 함께 그 어느 때보다 경치가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예년 같지 않거든요. 단풍이 지각한 거죠. 기후온난화 탓인 모양입니다. 이러다 산에 올라도 멋진 풍경을 보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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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은 언제 봐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일출을 보느냐에 따라 그 정도가 다릅니다. 수리티재는 일출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명소 중의 한 곳입니다. 때를 기다렸습니다. 안개가 언제 끼는지. 마침 그때를 만났습니다. 여명과 함께 가을안개가 덮인 산 아래에선 모릅니다. 벗어야 아름다운 걸. 아침해가 실오라기 같은 속옷을 벗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아름답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거짓과 위선을 벗어야 아름다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