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치던 날
눈보라가 사정없이 몰아치는 날은 걷기 힘듭니다. 너무 강렬하다 보니 눈이 눈을 가려 앞이 안 보입니다. 손도 꽁꽁 얼어붙게 합니다. 아무리 애를 써 막아보려 해도 거센 눈보라 앞에선 소용없습니다. 눈보라는 겨울의 혹독함 바로 그 자체입니다. 모진 눈보라를 만나 본 사람은 겨울이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을 겁니다.
눈 내리는 날, 겨울 속의 낭만적인 풍경을 기대하고 나왔는데 눈보라를 만났습니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시골, 본의 아니게 고립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눈보라에 갇히면 어쩔 수 없이 세상과 단절된 것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눈보라가 날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건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마치 내가 시베리아 평원에 나 홀로 서 있는 것처럼.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난 카메라를 들고 연신 셔터를 눌렀습니다. 한편으로 진정한 겨울 풍경을 만난 것 같아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 같지 않습니다. 셔터를 눌러도 바람과 눈이 어우러진 눈보라가 실감 나게 표현되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엄청날 정도로 몰아치는 눈보라임에도 사진 속에 풍경은 밋밋하게 보입니다.
흔한 말로 보이는 것과 실제 상황이 너무 다른 겁니다. 아, 이래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 있나,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시각적으로만 보여 주는 사진의 한계였습니다.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그런 상황 말입니다. 애초부터 불가능이었습니다. 사진으로 눈보라를 표현한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 겪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전 학년말시험을 하루 앞두고 내게 닥친 시련이 눈보라 같았습니다. 새벽부터 배가 아팠습니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이었습니다.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참고 이른 아침 아버지와 같이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습니다.
복막염 수술을 받았습니다. 일주일 뒤 퇴원하는 날 눈보라가 엄청 몰아치던 날이었습니다. 결국 시험도 치르지 못한 채 방학을 맞았죠. 그런데 염증 때문에 수술 부위가 아물지 않은 겁니다. 원인은 장결핵이었습니다. 불가피하게 또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개학 이후 3학년이 되어서도 오후 수업을 받지 못한 채 치료차 여름방학 때까지 병원에 다녔습니다.
극도로 허약해진 건강, 대입을 목전에 두고 어떻게 해야지 몰랐습니다. 거센 눈보라가 내 앞을 막는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휴학할까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자신 없었습니다. 결국 눈높이를 낮추기로 하고 대입에 임했습니다. 어려운 집안형편을 감안하면 하루라도 빨리 한 걸음이라도 나가는 게 중요했습니다.
인생의 눈보라는 시련입니다. 갈 길이 먼데 발목을 붙잡습니다. 하지만, 앞을 막아도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쉬운 길이 없습니다. 고난을 이기면 조금씩 길이 열립니다. 눈보라가 길을 끊어도 한 걸음 내딛어야만 합니다. 지나고 보니 그때 눈보라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백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