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해, 새해
김치찌개는 묵은지로 해야 제맛입니다. 찜이나 수육도 그럴 겁니다. 묵은지 특유의 깊은 맛은 삼겹살이나 목살에도 아주 잘 어울립니다. 퇴근 무렵 술 한 잔 생각날 때면 동료들과 어울려 스트레스를 날리는데 이만한 게 없었죠. 신김치나 햇김치로는 이런 깊은 맛이 나지 않습니다. 묵은지는 적어도 6개월 이상 숙성시켜야 하니까요.
그런데 묵은해라는 표현은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묵었다는 얘긴 오래되었다는 말이잖아요. 새해가 되어도 고작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묵은해라고 하는 건 좀 지나치단 생각이 듭니다. 묵은지처럼 숙성시켜 나중에 꺼낼 일도 없는데 연말이면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자는 식의 말을 종종 하거나 듣습니다.
말 그대로라면 2024년은 묵은해입니다. 물론 새해라는 말을 하려니까 상대적으로 묵은해이긴 합니다. 불과 하루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하지만 묵은지와 햇김치는 확연하게 다르거든요. 그래서 난 묵은해라는 말이 거슬립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묵는 해와 새해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묵은해를 보내는 마음은 다른가 봅니다. 2024년 마지막 날 해넘이 사진을 찍으러 나왔는데 평소와 달리 사람이 많습니다. 묵은해를 보내는 아쉬움 때문이겠죠. 하루 차이로 시간의 경계, 아니 세월의 경계를 넘어가야 하는 삶의 의미와 마음 다짐이 달라지니 그럴 거라 나는 생각합니다.
2024년 12월 31일, 해넘이 모습,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해마다 비슷합니다. 현장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는 사람도 많고, 찍은 사진을 친구나 지인들에게 보내는 사람도 많이 보았습니다. 사람마다 어떤 마음일까. 비슷할 겁니다.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세월이 빠르게 가는구나.
새해 첫날 새벽 6시 20분, 집을 나섰습니다. 2024년 마지막 날 해를 보내고 다시 그해를 카메라에 담으로 나서는 길입니다. 이름난 일출 명소는 매년 사람들로 북적이니 굳이 먼 곳까지 가 개고생할 필요 없을 것 같아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가 사진을 찍을 생각입니다. 한두 번 찍어보는 일출도 아니니까요.
사실 불과 몇 시간 전에 찍었던 일몰의 주인공이나 새해 첫날 카메라에 담은 일출의 주인공은 똑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독 새해 첫날 일출만 난리법석입니다.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묵는 해(12월 31일)와 새해(1월 1일)는 말만 다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묵은해니 새해니 따질 필요 없습니다. 새해 첫날만 요란 떨 필요도 없습니다. 나름 새해니까 뭐 좀 해 볼까, 생각하다 보면 며칠이 훌쩍 지나갑니다. 그러다 다시 묵은해에 그랬던 것처럼 그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큰 변화 없이 일상으로 복귀하죠. 왜냐하면 늘 반복되는 것에 익숙해져 있거든요.
새해니까 모처럼 미래형 동사의 시제가 머릿속에 등장합니다. ‘올해엔 ~ 할 거야’ 2024년 1월에도 그랬을 겁니다. 똑같이. 중요한 건 우리의 삶에는 오직 현재 시제만 있습니다. ‘새해엔 ~ 할 거야’를 ‘난 지금 ~하고 있어’ 해야 이루어집니다. 인생은 현재 동사(진행형)입니다. ‘묵은해니 새해니’ 하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