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에세이/아포리즘

여백의 미학

훈 작가 2025. 2. 11. 00:00

눈이 내립니다. 수채화 같았던 지난가을의 빛을 지위버립니다. 화려한 빛의 향연은 끝났습니다. 색의 미학을 뽐내던 형용사가 빛의 속도로 사라졌습니다. 세상은 흑과 백으로 단순화된 피사체만 남았습니다. 이 순간을 피카소가 그리더라도  예술적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겁니다. 오히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더 빛날 겁니다.
 
겨울이 그린 수묵화는 단조로움만 남습니다. 눈이 피사체와 색의 공간을 삼켜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쩔 수 없이 침묵의 세계로 빠져들어 명상에 잠깁니다. 비어 있는 공간에 색의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린 그 공간을 여백이라 합니다. 채움이 아닌 비움을 통해 만들어진 미학을 우린 이렇게 부릅니다. 여백의 미라고.
 
여백의 공간엔 오로지 비움만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겨울을 우울한 시간으로 받아들이며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건 무지(無知)해서 그런 겁니다. 공간을 색으로 채워야만 밝고 아름다운 줄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백이 만든 미학을 깨달았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겨울이 그린 수묵화의 진가를 몰라서 그런 겁니다.
 
여백(餘白)과 공간(空間)의 같은 듯 보이지만 다릅니다. 여백은 비움이지만, 공간은 뭔가를 채우기 위해 비워둔 인위적인 시간과 장소를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 공간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백은 채우고자 하는 욕망을 과감하게 버리고 남겨두어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나는 겨울이 만든 공간에 들어와 있습니다. 침묵의 공간이지만 빛을 버려야만 여백의 미를 담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빛을 버렸습니다. 공간에 있는 걸 다 담기보다는 비움을 택했습니다. 비우고 비우다 보니 수묵화 같은 사진이 되었습니다. 눈내린 겨울, 비움을 통해 수묵화같은 사진을 담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