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

겨울과 봄 사이엔 거리가 없습니다. 아웃이지만 살갑게 지내는 사이는 아닙니다. 서로 시샘을 할 때가 있긴해도 앙숙으로 지내지 않으니 나쁜 사이도 아닙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품위를 지킵니다. 봄은 겨울이 있어 존재가 빛나고, 겨울 또한 봄이 있어 디욱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사실 서로가 다르다는 걸 잘 알기에 미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운명적으로 이웃으로 지내야 하는 잘 알기에 다투지 않습니다. 바람의 언어와 햇살의 눈빛만으로도 서로 만났다 헤어져야 하는 때를 잘 알고 있습니다. 자연의 무대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에 그들 둘 사이에는 마음의 거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 너와 나, 나와 너 사이는 어떨까요? 거리가 존재합니다. 점( ․ ) 하나 차이인데 다릅니다. 내 안의 네가 없고, 네 안의 내가 없습니다. 세상은 ‘나’만 빼고 나면 모두 ‘너’가 됩니다. 그 사이엔 거리가 존재합니다. 그걸 우리는 관계라고 말합니다. 다만 너와 나의 관계는 거리에 따라 남이 되고 또는 우리가 됩니다.
‘너’의 개념은 다양합니다. '나'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포함한 모든 대상이 ‘너’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와 정체성이 다른 사람만 ‘너’로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 관계에 국한하려 의미를 규정하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너’와 ‘나’는 모든 관계를 사회적 동물 관계로 접근하고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럼, 너와 나의 관계를 이어주는 게 무얼까? 그건 사랑입니다. 사랑의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관계가 정해집니다. 가까울수록 사랑의 밀도가 무한정으로 큽니다. 너와 나는 사랑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출발점은 가족입니다. 가족은 '너'와 '나'로 관계를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족을 벗어나면 다릅니다. 사랑의 거리가 가깝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린 사랑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나와 다른 너를 사랑하도록 말이죠. ‘너’와 ‘나’, ‘나’와 ‘너’ 서로가 생존하기 위한 불가피한 전략적 선택입니다. 일종의 생존 방식이자, 공동체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한 규범인 걸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너’와 ‘나’가 만나면 ‘우리’가 됩니다. 겨울과 봄, 서로 다른 '너'와 '나'일 수 있습니다. 내가 겨울이면 너는 봄이고, 네가 겨울이면 나는 봄이 될 수 있습니다. 겨울과 봄은 계절이란 틀에서 공존합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계절은 우리(We)입니다. 서로 같이 계절의 틀안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라는 개념을 지키고 있는 셈입니다.
겨울과 봄은 서로 다투지 않고 자연이란 공간에서 잘 지냅니다. 그런데 우린 어떻습니까? 지난해 말부터 서로 갈라치기 하며 싸우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화(士禍)정치같은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너'와 '나'를 떠나 '우리'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