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의 요정

어린시절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마음껏 하늘나라를 날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그 보다 신나는 놀이는 없습니다. 이제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인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더 하늘을 날고 싶은 마음에 조금만 더 놀다 돌아가야지 생각하고, 여태껏 가 보지 못한 산 너머까지 가고 있는데 타고 있던 양탄자가 바람에 마구 흔들립니다.
눈을 떴습니다. “뭐 해? 일어나지 않고.” 꿈이었습니다. 엄마는 빨리 밥 먹고 학교 갈 준비를 하라고 다그칩니다. 어린 시절 흔하게 꾸었던 꿈은 엄마는 늘 개꿈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꿈은 늘 상상력을 자극하고 모험을 즐기는 유일한 환상 여행이었습니다. 꿈 이야기를 개꿈이라 무시하는 어른들이 이상했습니다.
만화 영화 ‘피터 팬’에서 ‘팅커벨’를 보았을 때 요정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상상과 창작의 영역에 존재하는 캐릭터였습니다. 그럼에도 ‘요정’이란 말을 우린 많이 씁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도깨비와 비슷한 개념의 말인데도. 왠지 도깨비는 거부감이 느껴져서 그럴 겁니다. ‘요정’이란 말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생각해 보면 ‘요정’은 꿈의 영역에 존재합니다. 어린 시절 우린 꿈이란 환상 속에서 현실과 거리가 먼 모험과 사랑을 경험하고. 때론 용기, 지혜 같은 가치를 배웁니다. 때론 어려운 상황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화 같은 꿈속의 이야기를 통해 현실에서도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교훈을 배웁니다.
꿈 이야기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심어주며, 세상을 더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마법 같은 이야기가 어른들이 볼 땐 말이 안 되지만 아이들에겐 상상이 현실인 것처럼 꿈과 연결 지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순수함이 유지되어야 어른이 되어도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요정이 존재한다면 꽃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벚꽃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꽃이 작은 데다 하얀 꽃잎이 앙증스러워 요정이란 말과 딱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을 한 겁니다. 꽃을 보노라니 자꾸만 그런 상상 속에 빠지게 됩니다. 마치 봄의 요정이 벚꽃으로 환생한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벚꽃에 흠뻑 취해 있을 때 반대편 햇빛(逆光)에 비친 벚꽃이 유난히 하얀 꽃잎이 날개를 활짝 펼친 것처럼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벚꽃이 바로 순광(純光)을 받을 때와 다른 데다 배경이 어두워서 그런지 느낌이 확실히 다른 느낌이 듭니다. 꽃이 정말 예쁘다고 생각할 때 바로 이게 요정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환상과 상상이 영역을 오가면서 찾은 단어가 요정이었던 겁니다. 어린 시절 만화 영화 속에나 등장하는 요정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셔터를 누르는 순간 요정의 환생이 이 모습이라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봄이면 사랑을 듬뿍 받는 벚꽃, 요정이란 비유가 지나친 과장은 아닐 듯싶습니다.
꿈은 잠자는 동안 경험하는 환상의 세계입니다. 그 안에서 만나는 요정은 희망을 심어주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요정이란 말을 꺼내고 꿈을 이야기할 때 개꿈이라 하면 안 됩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아이들의 눈빛을 보며 들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