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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지각 단풍을 보면서

by 훈 작가 2024. 11. 15.

중학교때 청소 당번을 도맡아 했습니다. 밥 먹듯이 지각을 많이 했거든요. 때론 간발의 차이로 운동장을 두 바퀴 돌고 나서 교실에 들어갔죠. ‘지각’, 별로 좋지 않은 단어인데 날 따라다녔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단어가 올해엔 단풍에 붙었습니다. ‘지각 단풍’, 단풍이 들으면 많이 서운해할 겁니다. 찬사를 보내야 하는데 지각이라니….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단풍을 기다렸을 텐데 늦게 오니 기분이 언짢은 겁니다. 그러니 아무 생각 없이 늦는데 만 방점을 두고 지각이란 말을 붙였을 겁니다. 그것만 중요하게 여기는 거죠. 나는 기다리고 있는데 상대방은 올 시간인데도 오지 않으니 짜증스러운 겁니다.
 
그래도 기다렸던 가을입니다. 찜통더위에 많이 시달렸잖아요. 너나 할 것 없이 가을이 반가운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기다림 속에는 숨어 있는 설렘이 있거든요. 가을의 미학이라 일컫는 단풍을 만나게 될거니까요. 이제나저제나 단풍 소식이 뉴스를 타고 안방에 전해지길 기다렸습니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닐 겁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기다렸던 소식이 점점 늦어졌습니다. 그러더니 ‘지각 단풍’이란 말이 들렸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도 똑같을 거란 법은 없잖아요. 그럼에도 뭐가 못마땅했는지 언론에서 ‘지각 단풍’이란 말을 붙인 겁니다. 물론 늦어짐에 대한 수식어죠. 그만큼 기다린 사람들의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말 일 겁니다.
 
날이면 날마다 인터넷 검색창에 단풍 명소를 치고 상황이 어떤지 훑어봐도 반가운 정보가 없었습니다. 상황이 녹록하지 않으니 안 올라오나 보나 했습니다. 이러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풍 사진은 절정의 시기에 찍어야 그림인데 은근히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속리산에 왔습니다. 많이 왔던 곳이죠. 대충 어디서 찍어야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 되는지 잘 알고 있죠. 가는 길에 먼저 말티재 전망대에 들렸습니다.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이 많더군요. 전망대에 오르니 탁 트인 풍경이 가슴을 씻어 줍니다. 다들 멋지다 하는데 내겐 별로였습니다. 어쩌면 까칠한 내 눈높이 때문일 겁니다.

다시 10분을 달려 속리산에 도착했습니다. 평일인데 사람들이 많습니다. 외국인 단체 관광객도 눈에 띄었습니다. 전에 받던 입장료도 없어졌으니 부담 없어 좋았습니다. 그런데 예년의 보았던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웠던 가을 미학이 없는 겁니다. 단풍이 늦기는 했어도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왜 이럴까? 착잡한 마음이었습니다.
 
‘아, 옛날이여’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아름다움 가을이 아닙니다. 마치 보물 찾기라도 하듯 사진을 찍어야 했습니다. 가을 하늘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데 가을 숲은 정반대였습니다. 엊그제 찾았던 문광저수지는 예년의 80% 정도로 구경할 만했는데. 속리산 단풍은 실망이었습니다. 지각했으면 실망까지 시키지 말아야지. 아, 가을이 밉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연을 아끼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문제는 알면서 행동을 안 하는 거죠. 지각 단풍이라 말하며 아쉬움을 말할 때가 아닙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침묵의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겁니다. 경고를 외면하면 지각 단풍이 아니라, 아예 단풍이 안 올지도 모릅니다. 가을 수업에 결석하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더 늦기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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