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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여러번 가 보았지만 겨울 한라산을 두 번 가보았습니다. 물론 오래전이죠. 한 번은 백록담 정상 100미터를 앞두고 발을 돌려야 했죠. 김포행 비행기 시간 때문에. 다행히 한 번은 정상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없습니다. 몇 번을 갔어도 한라산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죠. 산에 오를 계획이 없었으니까요.
1,100도로는 제주시와 서귀포시 연결하는 도로로 한라산 중턱에 있어 한라산의 남쪽과 북쪽을 가르는 경계입니다. 해발고도가 1,100 고지여서 붙은 이름이죠. 특히, 설경이 아름다워 겨울철 눈이 내리면 많은 사람이 찾는 곳입니다. 그날은 우연이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서귀포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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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정상이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게 보였습니다. 제주시는 찬바람만 불고 눈이 전혀 오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1,100 도로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설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죠. 다행히 보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서귀포로 가면 그만이니까요. 그런 생각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운이 따랐던 날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올라가니 눈이 보이더군요. 올라가는 차들이 눈에 많이 띄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1,100 고지에 도착하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주차 전쟁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날씨가 돌변하더니 파랗던 하늘이 사라지고 눈보라와 강풍이 휘몰아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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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이 워낙 좁아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아수라장이란 말이 딱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 이상 꺼낼 표현이 없었습니다. 어찌 됐든 올라왔으니 주차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시간을 보냈죠. 때마침 갓길에 주차했던 승용차 한 대가 빠져나가더군요.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승용차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휘몰아치는 바람이 마치 북극에 온 것 같았습니다. 추워도 너무 추웠습니다. 몇몇 사람은 아예 차에서 내리다 다시 차 안으로 그냥 들어가더군요. 손이 시린 게 아니라 손이 얼어붙을 것 같은 혹독한 추위와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래도 사진을 찍을 욕심에 포기하고 그냥 갈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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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雪景) 보러 온 사람들이 추위에 본능적으로 "너무 추워, 너무"하며 움츠리고 한라산 눈꽃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에스키모인처럼 얼굴을 감춘 채로 겨울 정취를 감상하고 있더군요. 사진을 찍기는 해야 하는데 무얼 어떻게 찍어야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좀처럼 주머니에서 손을 빼기 싫었습니다. 그래도 뭔가는 찍어야 하는데 생각하며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제대로 찍으려면 생각도 해야 하고 멋진 피사체를 물색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추위였습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온몸을 꽁꽁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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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대충 몇 장을 담아야겠다고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찍자마자 얼른 손을 주머니에 넣어야 했습니다. 손이 얼어 셔터를 누를 수가 없었거든요. 손을 어느 정도 녹인 다음 사진을 찍고 또 녹였다가 다시 찍어야만 했습니다. 뭔가 멋진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할 여유가 아예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었습니다.
사진을 보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한라산의 눈꽃 사진보다 그날 추웠던 날씨가. 1,100고지 눈꽃 사진을 찍긴 했지만, 그냥 그날 너무 추웠다는 기억만 떠오릅니다. 생전에 그렇게 추웠던 기억을 없을 듯합니다. 혹독한 추위라는 말을 정말 실감 날 느꼈던 날이었으니까요. 그래도 기회가 닿는다면 1,100 고지의 눈꽃은 다시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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