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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보리밥

by 훈 작가 2025. 6. 23.

보리밭을 보고 있노라면 한 편의 흑백영화 같은 장면이 떠오릅니다. 
 
점심시간이면 담임선생님이 도시락 검사를 했습니다. 60년대에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면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 겁니다. 어쨌든 그땐 그랬으니까요. 쌀밥만 담아 온 아이들은 지적을 당하며 혼났습니다. 보리쌀을 썩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땐 정부 차원에서 혼식과 분식을 장려했습니다. 그만큼 쌀이 부족했습니다.
 
도시락은 쌀밥과 보리밥 비율이 7 : 3 정도로 되어야 혼나지 않았습니다. 개중에 보리밥을 싫어하는 부잣집 아이들은 윗부분만 살짝 보리밥을 얹어 오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이 알아차릴 수 없도록 잔머리를 굴린 거죠. 그러다 걸리는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꿀밤을 맞곤 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쌀과 보리 비율이 5 : 5인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보리밥 특성상 먹고 나면 배에 가스가 차서 방귀를 많이 뀌게 됩니다소화가 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문제는 냄새가 장난이 아닙니다굉장히 지독합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수업 시간에 방귀를 뀌면 코를 막는 소란이 일어나죠. 누가 뀌었냐고. 아닌 척했지만 방귀 뀐 아이는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졌죠.

이미지 출처 : 다음

책 보자기 벗어 마루에 던져 놓고 부엌에 가 보면 바람 잘 통하는 벽에 붙여 대나무를 엮어 만든 선반 위에 있는 소쿠리에 보리밥을 모시나 삼베 보자기에 덮여 있었죠사기그릇에 보리밥을 퍼담아 물항아리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부으면 다음 찬장에 있는 된장과 풋고추를 꺼내 찍어 먹던 추억이 생각납니다.
 
어린 시절 시골 마을 개울에서 멱 감고 물장구치고 배고팠던 추억이지만 쌀밥에 고깃국으로 배불리 먹는 것이 소망이었습니다따가운 뙤약볕 학교 길은 멀기도 했죠..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면 어른들은 모두 논밭으로 일 나가고사립문과 부엌문도 휑하니 열려 있던 집, 문단속조차 할 필요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입니다. 쌀이 부족하던 시절 먹던 보리밥, 식감이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물컹물컹하고 끈적이는 데다 꺼칠꺼칠합니다. 게다가 탱글탱글해서 오래 씹어야 합니다. 그 시절엔 반찬도 별로 없었죠. 방법은 고추장에 비벼 대충 씹는 듯하다가 넘기는 겁니다. 먹고 나면 온종일 엉덩이에 불이 나죠. 방귀 때문에.
 

이미지 출처 : 다음

격세지감이란 말이 실감 납니다. 요즘은 보리밥이 건강식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되고, 특히 당료에 민감한 사람들이 쌀밥이나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혈당이 올라가 대신 보리밥을 많이 먹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보리는 당지수가 낮아 급격한 혈당 변동에 염려가 없고 비만 예방에 좋기 때문이랍니다.
 
그 시절엔 명절이나 되어야 쌀밥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지금은 보릿고개란 말이 국어사전 안에나 있는 낱말이지만 그땐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보리밭이 경관 농업으로 자리매김하여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지만 1960년대엔 식량을 해결하는 1차 산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밥상에 쌀밥이 오른 건 1970년대 통일벼가 나오고서야 해결이 돼 없습니다.
 
보리밥은 한때 우리가 넘어야 할 ‘보릿고개’로 기억되는 단어였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과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이렇게 바뀔 줄 몰랐습니다. 사라졌던 보리밥이 이젠 귀한 음식으로 다시 살아난 걸 보니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역설적으로 서구화된 음식문화가 사라졌던 보리밥을 부활시킨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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