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춘수의 시 <꽃>입니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죠. 그런데 시에 나오는 <꽃>이 무슨 꽃일까요? 뜬금없는 무슨 질문이야 할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시의 언어는 상징적이면서 함축적인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꽃이 무슨 꽃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꽃이 무슨 꽃인지 궁금합니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이름이 무얼까?
눈치 빠른 사람은 느닷없이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럴까, 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다름 아닌 <꽃>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모든 꽃은 저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우린 헷갈리지 않게 다 이름을 붙여 식물도감에 등재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저런 꽃들이 모여있는 꽃밭에서 누군가를 부르려면 꽃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콕 집어 누군가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꽃들이 멍하니 쳐다볼 겁니다. “누굴 찾지?” 하고요.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스마트폰이 없던 아날로그 시절) 그땐 ‘카페’ 간판 대신 ‘다방’이 대세였습니다. 종업원 아가씨가 “김 사장님 전화받으세요?” 하니까 서너 사람이 자기 전화인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랍니다. 굳이 어떤 상황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 갈 겁니다. 이름은 그 사람만의 정체성을 지닌 고유명사인데 김 사장이라 하면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 시절 흔히 있었던 happening입니다.
꽃 이름을 제대로 모르던 시절, 난 들국화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름 그대로 들에 핀 국화꽃이려니 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가을에 피는 국화와 비슷할 것이라 했었죠. 그런데 어느 날 그 무식함이 탄로가 난 겁니다. 가을꽃을 찍으러 간 출사지에서요. 꽃을 보고 들국화가 흐드러지게 폈다고 무심결에 나온 겁니다. 그런데 옆에서 같이 꽃을 찍던 분이 웃으며 그러더라고요.
“선생님, 들국화란 꽃은 없습니다. 이건 구절초입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인터넷에서 <들국화>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서는 원래 들국화라는 이름은 식물학상에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들에서 자라는 구절초, 쑥부쟁이류, 벌개미취, 산국, 감국 등을 통틀어서 들국화라고 부른다고 설명되어 있답니다. 그러니까 출생신고에 비유하면 ‘들국화’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불리고 있다는 겁니다. '들국화'라는 이름을 개나소나 다 쓰고 있는 거나 다름었던 겁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에서 그의 이름이 들국화였다면 과연 꽃이 된 주인공이 누구일까요. 아무도 모르죠. 누구인지. 어떤 이유로 '들국화'란 이름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건 멀쩡한 제 이름이 있는데 왜 그렇게 불렀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모르면 그럴 수밖에 없죠. 본의 아니겠지만 안타까운 일입니다.
'들국화'는 정체성 없는 이름입니다. 꽃의 입장에선 혼란스러울 겁니다. 내 이름을 두고 정체성도 없는 이름을 부른다면. 막연하게 꽃이라 이름만 불러주면 꽃들이 이거 뭐지? 의아해할 겁니다. 반드시 이름을 불러주어야 합니다. 김씨 성(姓)이 많은 회사 사무실에서 ‘Mr Kim’하고 부르면 누굴 부르는지 모릅니다. 안 거런가요. 마찬가지로 구절초를 들국화라 부르면 옆에 있는 쑥부쟁이나 산국이 헷갈려 할 겁니다. 내 이름은 구절초입니다. 꼭 이름을 불러세요, 구절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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