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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단편소설

빼빼로데이 (6)

by 훈 작가 2024. 11. 10.

이미지 출처 : 한국언론진흥재단

   

   빼빼로데이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번에는 좋아한다는 말을 꼭 할 생각이다. 은영이도 싫어하지 않는 것 같다. 어제 인터넷 쇼핑몰에서 BTS 사인이 된 앨범도 신청했다. 빼빼로 선물만 사면 된다. 그런데 걱정되는 게 딱 하나 있다. 떨지 않고 남자답게 고백하는 거다. 연습이라도 해야 할지, 아니면 그날 떨지 않게 우황청심원이라도 먹어야 할지.

   토요일 오후, 시내버스를 타고 H 백화점으로 갔다. 인근 도로는 매우 혼잡했다. 백화점에 들어서니 할인행사 기간이 아닌데 쇼핑객들로 붐볐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매장으로 내려갔다. 빼빼로 행사매장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빼빼로데이는 우리 또래 애들의 밸런타인데이가 되어버렸다.

   매장을 두 바퀴나 돌았다. 어떤 걸 좋아할까. 빨간색 포장은 너무 흔하고, 분홍색은 유치해 보였다. 쉽게 고를 수가 없다. 망설이다 손에 집은 게 보라색 하트모양 상자였다. BTS 콘서트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체크카드로 계산하고 포장 코너로 갔다. 하늘색 상자에 다시 넣은 다음 리본까지 달고 나니 그럴듯해 보였다.

   1층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였다. 빼빼로 행사장 통로에 은영이가 보였다. 쟤도 나에게 주려고 사러 왔나 보다 하고 그쪽으로 가려는데. ! 이게 뭐지. 옆에 내 또래 남자애가 있다. 그것도 서로 손까지 잡고. 갑자기 화가 끓어올랐다. 잠시 멍하니 바라만 보다 뒤돌아섰다. 한껏 부풀어 올랐던 풍선에서 바람이 확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안 되겠다 싶어 다시 매장 쪽으로 갔다. 휴대폰을 꺼내 두 사람 반대쪽 사람들 뒤에 숨어 몇 초간 동영상을 찍고 매장을 빠져나왔다. 백화점을 나서는 데 왜 자꾸 눈물이 나오려는 걸까. 꾹 참고 참았는데 눈물 한 방울이 삐져나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얼른 오른손으로 닦았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보도 위에 떨어진 낙엽과 함께 저 멀리 도망치듯 달아났다. 빈 가슴에 비구름이 몰려왔다. 차디찬 가을비가 내 마음을 적신다.

 

***

 

   월요일, 학교 수업이 끝나고 생각했다. 학원에 갈까, 말까. 어차피 은영에게 줄 선물은 가져오지도 않았다. 학원에서 은영이를 만나면 어색할 게 너무 뻔하다. 만나면 눈치 빠른 은영이가 내 마음을 모를 리 없다. 그렇다고 아닌 척하는 것도 힘들다. 그렇다면 차라리 안 가는 게 낫다. 엄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떡하지. 그래, 피시방에 가서 게임이나 하자.

4일 연속 강의를 빼먹었다. 그러자 은영이한테 카톡이 왔다. 마땅한 핑계 댈 만한 게 생각나지 않았다. 어떡할까, 하다 몸이 안 좋아서.라고 보냈다. 바로 카톡이 날라 왔다. 언제 나올 거니?아무 생각 없이 내일.하고 카톡을 날렸다. 그래, 내일 보자.하고 다시 카톡이 왔다.

   얘가 정말 뻔뻔하네. 양다리 걸치며 나를 속였으면서. 날 생각하는 척하는 거야. 기분이 나빴다. 그나저나 내일 만나면 어떡하지. 일단 동영상을 보여 주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봐야 하나, 아니면 나 말고 남친이 있냐고 따져야 하나.

다음 날, 은영이와 불편한 얼굴로 마주치는 걸 피하고 싶어서, 일부러 5분 정도 늦게 강의실에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영어로 미안하다고 인사를 했다. 피하고 싶은데 은영이와 눈이 마주쳤다. 은영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보며 방긋 웃는다. 나는 얼른 뒤로 가 빈자리에 앉아 영어교재를 꺼냈다.

   강의가 끝나자, 은영이가 다가왔다.

몸은 어때?”

~ 어 괜찮아.”

딴짓하듯 대답했다.

얼굴이 많이 상한 것 같네.”

은영아, 조용한 데서 할 얘기가 있는데 시간 좀 내줄래?”

시간, 그러지 뭐.”

세븐 일레븐 옆 목련공원 어때?”

그래, 사람도 없고 조용하니까 거기가 좋겠다.”

   우리는 학원가 이면 도로를 지나 세븐 일레븐 맞은편 공원 쪽으로 갔다. 은영이 눈치챘는지 내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말이 공원이지 목련공원은 동네 놀이터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 곳이다. 노인정 같은 정자 하나가 모퉁이에 있고 나무 벤치 몇 개가 고작이다. 내가 먼저 벤치에 앉자, 은영이가 내 표정을 살피며 옆에 앉았다. 할 얘기가 뭔지 빨리 말해보라는 듯 은영이가 나를 쳐다본다. 나는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은영아, 솔직하게 말해줘. , 나 말고 남친 있니?”

뜬금없이 무슨 얘기야?”

있어, 없어?”

   나는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자 은영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없어.”

정말?”

나는 은영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

내가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을 클릭해 보여 주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럼. 이게 뭐야?”

.”

동영상을 다 본 은영이가 입을 열었다.

“H 백화점 맞지?”

알면서 뭘 그러니?”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호호호.”

   은영이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 이게 웃을 상황이니?’ 하고 말이 나올 뻔했다. ‘얘가 생각보다 뻔뻔하네. 증거가 확실한데 시치미 떼려고 해. 정말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 웃음을 멈춘 은영이가 다시 나를 쳐다본다.

너 이것 때문에 안 나왔구나. 그렇지?”

, 너 같으면 열 안 받겠냐?”

아니, 열 받아.”

그럼, 양다리 걸친 거 맞네.”

그렇게 믿고 싶니? 내가 그런 애로 보여.”

   은영이는 끝까지 우겼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당당했다. ‘얘가 뭘 믿고 이렇게 나오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 강민우, 이게 내가 아니면 어떡할래?”

은영이가 세게 치고 나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다.

아니면 내가 너를 누나라고 불러줄게.”

, 진짜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책임? , 나 남자야. 왜 이래. 남아일언, 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란 말도 모르니.”

나는 큰소리쳤다.

, 분명히 말했다. 약속한 거야.”

물론이지.”

좋아. 그럼, 내일 전에 갔던 빵 카페로 2시까지 나와. 알았지?”

그래, 알았어.”

   은영이는 뭔가 단단히 벼르는 표정이다.

--, , 이거 때문에 한동안 잠도 못 잤겠구나.”

, 아니, 아니야. 내가 왜 잠을 못 자.”

은영이가 싸늘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내일 꼭 나와. 알았지. 나 먼저 갈게.”

   못마땅한 얼굴로 돌아선 은영이가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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