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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추월서정(秋月抒情)

by 훈 작가 2024. 12. 2.

단풍은 우크라이나 전시 정부의 눈물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네츠크 시의 하늘을 생각게 한다.
전쟁은 한 줄기 구겨진 옷자락처럼 찢어져
월광(月光)은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빨간 기적 소리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고속열차가 들을 달린다.
자작나무의 피부(皮膚) 사이로
아파트 지붕은 썩은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국경선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두루마리 휴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포탄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처참(悽慘)한 생각 버릴 곳 없어
이웃에 띄우는 SOS 하나.
기울어진 서유럽의 장벽(障壁) 저쪽에
고독한 외침 어둠에 잠기어 간다.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오길 기윈하며-

 

꼭 찍어 보고 싶은 사진이 있었습니다. 보름달과 단풍이 어우러진 사진입니다. 아름다운 사진이 될 거라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회를 포착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단풍이 한창일 때 보름달이 떠야 합니다. 날씨도 맑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잠잠해야 합니다. 이런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카메라를 잘 다루어야 합니다.
 
지난 11월 15일이 음력으로 보름이었습니다. 슈퍼 문이 뜬다는 정보를 접하고 작은 설렘이 마음에 일렁였습니다. 이번에 찍을 수 있을까? 밤에 찍는 사진은 빛이 부족해 피사체에 초점을 맞추는 게 쉽지 않습니다. 경험도 부족하려니와 카메라를 익숙하게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단풍이 곱게 물든 장소도 찾아야 하는데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수원에 있는 친구를 만나고 오늘 길에 차창밖을 보니 슈퍼 문이 보였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카메라를 챙겨 나왔습니다. 아파트 주변과 근처 공원을 독수리의 눈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사진을 찍을 만한 장소가 있는지 바쁜 걸음으로 돌아다녔습니다. 마음에 드는 장소가 없습니다. 한참을 헤매고 다니다 도로변에 어설프게 달과 단풍이 렌즈에 들어오는 곳을 찾아냈습니다. 삼각대를 놓고 찍으려니 전깃줄, 전봇대, 건물, 간판 등이 걸려 내 마음을 애타게 만듭니다.
 
할 수 없이 스냅사진을 찍어야 했습니다. 아, 그런데 바람이 붑니다. 단풍잎이 흔들립니다. 바람이 멈추어야 하는 데 내 마음 같지 않습니다. 마음을 졸이며 기다립니다. 짧은 순간 바람이 멈출 때마다 셔터를 눌렀습니다. 찍고 또 찍어도 색감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피사체가 흔들려 답답했습니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인데 자꾸 초조해집니다. 예년 같았으면 단풍이 모두 져서 찍을 수 없었을 겁니다. 달밤에 나 홀로 체조하듯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래전부터 보름달과 단풍이 어우러진 사진을 찍으면 추월서정(秋月抒情)이란 제목으로 글을 써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김광균의 시 추일서정을 패러디한 시를 쓰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오늘에서야 추월서정(秋月抒情)이란 글을 포스팅하게 되었습니다. 제목은 그럴듯한 데 유명한 명시(名詩)를 패러디(parody) 하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개인적으로 이 시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어쨌든 지각단풍 때문에 작은 로망을 이루었습니다.  

추일서정(秋日抒情)
 
                                                                                                                            김광균(金光均, 1914~1993)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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