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로움이 구름바다에 섬처럼 떠 있다. 떨어진 거리만큼 마음은 외로움에 짙게 물들어 가고, 멀면 멀수록 크게 부풀어 올라 괴롭다. 마음과 마음을 잇는 마지막 통신선이 끊어진 걸 방치한 결과다. 처음엔 물리적 공간에서 싹이 튼 거리가 점차 심리적 공간으로 전이되면서 외로움이 별거 아닌 양 무시해 버린 탓이다.
외로움이 섬이 되기까지 돌아볼 시간이 있었다. 끊어진 공간에 조각난 상처를 외면하고 내 감정에만 충실한 게 잘못이다. 자존심은 늘 공주처럼 환대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는 마음은 그 누구도 시녀가 되어 받들어주지 않는다. 그 공간에 날아드는 쓸쓸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영혼을 우울하게 만드는 그림자가 되어 버린다.

외로움은 마음을 잇지 못하는 내 안에 공간이 존재하는 섬이다. 다만 마음의 창을 두드려 주는 빛이 외로움이 숨 쉬게 해주고 있어 호흡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 누구도 당신이 구름바다에 떠 있는 섬이 되도록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섬이 된 것 또한 아니다.
막연한 기대, 언젠가 만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언젠가 다시 또 인연이 될 수 있다는 마음이 빛을 타고 내려오거나 구름 파도를 헤치고 올 것이라는 꿈은 꿀 수 있다. 속세의 삶은 그 인연의 끈을 누군가 이어주니까. 그래서 외로움도 숨을 쉬며 살아간다. 그마저 없다면 당신은 언제나 구름 속에 갇힌 고도일뿐이다..

외로움은 고통이다. 특히 독방에 갇혀 면회조차 허용되지 않는 죄수에게 이보다 큰 고통은 없다. 자유를 박탈한 죄수에게 외로움은 설상가상의 극한 고통이다. 오래전 스티브 맥퀸이 주연한 영화 빠삐용은 그걸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살인죄로 몰린 그는 몇 번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다 절해고도의 감옥에 수용된다.
‘빠삐용’. 그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 검사는 그가 지은 죄는 인생을 낭비했다고 했다. 주인공은 고개를 떨군다. 인생을 낭비한 게 유죄라는 것이다. 그 말 한마디가 자유를 향한 집념을 불태우게 한다. 후회가 밀려오지만, 인생을 낭비했다는 깨달음이 그 자신을 눈 뜨게 했고,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다.

우리는 ‘빠빠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외로움을 느낀다면 혹시라도 인생을 낭비한 죄인이 아닐까,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 보자. 여기서 유죄냐 무죄냐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외로움이 스치는 감기 정도에 지나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심한 증세일 경우라면 다르다. 우리는 ‘빠삐용’ 일 수 있다.
탈출해야 한다. 외로운 섬에서. 오래 머무르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고, 자유를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죄를 짓는 거다. 심리적 방황은 짧게 스쳐야 좋다. 외로움을 타기 쉬운 이 계절, 자칫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처럼 인생을 낭비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외로움을 경계하자. 외로움. 인생에 결코 달가운 단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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