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한 놈이다. 놈은 스텔스 기능이 있는지 내 감시망을 무용지물로 만들며 뚫고 들어왔다. 마치 이란 전쟁에 투입된 침묵의 암살자라는 B2 전폭기처럼 예고 없이 슬그머니 내 안에 침입했다. 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믿었던 내 면역체계 방공망이 너무 쉽게 무너진 탓이다. 그럼에도 2~3일 지나면 괜찮겠지, 하고 난 생각했다.
생각보다 질기고 독한 놈이었다. 첫날은 목구멍 좀 까칠한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물을 자주 마시면 나을 거라 난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 오한까지 겹쳤다. 기어이 놈이 지원군을 추가로 파병된 모양이다. 그 영향으로 기침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밤에 야간 공습까지 이어져 잠을 설쳤다. 그나마 낮이면 증세가 덜 해 참을 만했다.
3일째부터 놈은 공세를 더 강화하기 시작했다. 목이 잠기기 시작하더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 기침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가슴팍을 때렸다. 가슴을 움켜쥐고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끓어오르는 가래를 펌프로 힘겹게 퍼 올려 세면대 구멍으로 보낸 후 소금물로 한 모금 마셔 헹군 다음 침대로 돌아왔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프다. 침대에 누워 정신 차렸다. 환각 상태처럼 어지럽다. 나는 어두운 밤 감옥에 유폐된 죄인처럼 눈만 멀뚱멀뚱 뜨고 천장을 보다가 이불속 동굴로 깊숙이 숨었다. 어떻게 잠이 들었나 모른다. 건강에 대한 자신감과 오만함이 불러온 참사다. 진작 병원에 가야 했는데, 때는 이미 늦었다.

어쩔 수 없이 3․1절 연휴를 보내고 병원을 찾았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환자들이 병원 대기실에 패잔병처럼 앉아 있다. 대기표를 뽑은 후 기다렸다. 차례가 되어 간호사에게 증상을 얘기하는데 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은 탓인지 잘못 알아듣는 표정이다. 나는 메모지에 간단하게 증상을 써 주고 기다렸다.
"선생님, 상태가 심한데요."
의사의 진료를 받고 주사를 맞았다. 5일분 약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니 문전성시를 이룬다. 모두 병원에서 본 얼굴들이다. 반갑지도 않은 놈과 동침하며 며칠 참고 지내야 했다. 내 기억으로 놈은 오래전부터 인류의 불청객이다. AI 시대인데 아작도 놈은 천하무적이다. 인류는 놈과 헤어지고 싶어 하는데 이놈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녀석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었다. 증세가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요 며칠 사이 수척해진 내 얼굴이 거울 속에 보인다. 무료 독감 예방 접종할 걸 그랬나 싶었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사서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내 몸도 나이를 속이지 때가 되었나 보다.
감기를 모르고 살다시피 했다. 이젠 옛말이 된 듯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 생물학적 노화와는 무관하지 않은 말이다. 아무리 천하장사라 하더라도 세월에 장사 없다는데 내가 이 놈한테 허세를 부렸나 보다. 겨울 다 갔나 보다 하고 건강에 자신감을 보인 나머지 잠시 방심했던 것 같다. 하여튼 독한 놈이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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