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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독한 놈

by 훈 작가 2026. 3. 8.
이미지 출처 : Daum

독한 놈이다. 놈은 스텔스 기능이 있는지 내 감시망을 무용지물로 만들며 뚫고 들어왔다. 마치 이란 전쟁에 투입된 침묵의 암살자라는 B2 전폭기처럼 예고 없이 슬그머니 내 안에 침입했다. 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믿었던 내 면역체계 방공망이 너무 쉽게 무너진 탓이다. 그럼에도 2~3일 지나면 괜찮겠지, 하고 난 생각했다.
 
생각보다 질기고 독한 놈이었다. 첫날은 목구멍 좀 까칠한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물을 자주 마시면 나을 거라 난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 오한까지 겹쳤다. 기어이 놈이 지원군을 추가로 파병된 모양이다. 그 영향으로 기침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밤에 야간 공습까지 이어져 잠을 설쳤다. 그나마 낮이면 증세가 덜 해 참을 만했다.
 
3일째부터 놈은 공세를 더 강화하기 시작했다. 목이 잠기기 시작하더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 기침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가슴팍을 때렸다. 가슴을 움켜쥐고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끓어오르는 가래를 펌프로 힘겹게 퍼 올려 세면대 구멍으로 보낸 후 소금물로 한 모금 마셔 헹군 다음 침대로 돌아왔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프다. 침대에 누워 정신 차렸다. 환각 상태처럼 어지럽다. 나는 어두운 밤 감옥에 유폐된 죄인처럼 눈만 멀뚱멀뚱 뜨고 천장을 보다가 이불속 동굴로 깊숙이 숨었다. 어떻게 잠이 들었나 모른다. 건강에 대한 자신감과 오만함이 불러온 참사다. 진작 병원에 가야 했는데, 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지 출처 : Daum

어쩔 수 없이 3․1절 연휴를 보내고 병원을 찾았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환자들이 병원 대기실에 패잔병처럼 앉아 있다. 대기표를 뽑은 후 기다렸다. 차례가 되어 간호사에게 증상을 얘기하는데 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은 탓인지 잘못 알아듣는 표정이다. 나는 메모지에 간단하게 증상을 써 주고 기다렸다.
 
"선생님, 상태가 심한데요."

의사의 진료를 받고 주사를 맞았다. 5일분 약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니 문전성시를 이룬다. 모두 병원에서 본 얼굴들이다. 반갑지도 않은 놈과 동침하며 며칠 참고 지내야 했다. 내 기억으로 놈은 오래전부터 인류의 불청객이다. AI 시대인데 아작도 놈은 천하무적이다. 인류는 놈과 헤어지고 싶어 하는데 이놈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녀석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었다. 증세가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요 며칠 사이 수척해진 내 얼굴이 거울 속에 보인다. 무료 독감 예방 접종할 걸 그랬나 싶었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사서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내 몸도 나이를 속이지 때가 되었나 보다.
 
감기를 모르고 살다시피 했다. 이젠 옛말이 된 듯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 생물학적 노화와는 무관하지 않은 말이다. 아무리 천하장사라 하더라도 세월에 장사 없다는데 내가 이 놈한테 허세를 부렸나 보다. 겨울 다 갔나 보다 하고 건강에 자신감을 보인 나머지 잠시 방심했던 것 같다. 하여튼 독한 놈이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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