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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여행이다/북유럽

스치는 인연일지라도

by 훈 작가 2023. 9. 19.

비가 내린다. 오슬로에 도착하던 날 첫 인연이 비였다. 여행길에서 만난 비는 불청객이다. 그런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봄의 리듬을 담은 왈츠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우수에 잠긴 소녀의 눈망울에 맺힌 애수(哀愁) 같았다. 나는 비에 대한 거부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감정일까 싶다. 

시내를 벗어났다. 비가 굵어졌다. 신경 쓰이지 않았었다. 숙소인 와달(Wadal)에 도착해서도 그치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봄비에 지나지 않겠지 여겼다. 그래서 내일은 그치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빗나갔다.  여행의 즐거움이 떨어져 걱정해야 하는 순간인데도 무슨 까닭인지 차분하기만 했다. 

비구름과 안개가 ‘게이랑에르’로 가는 63번 도로를 덮고 있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는 노르웨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자연 비경이다. 달리는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눈을 뜨니 차창 밖은 우윳빛 안개다. 심심한 나머지 카메라를 꺼내 풍경을 오려 담았다. 

버스에서 내리니 게이랑에르와 헬레쉴트 구간을 운항하는 배가 기다리고 있다. 배 끝머리 입구에 문이 큰 하마처럼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다. 차량이 페리선 주차장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출입구를 하늘 방향으로 들어 올린 모습이다. 먼저 여행객들이 페리선에 올랐고, 이어 줄지어 선 투어버스와 승용차를 한 대씩 승선시켰다. 

뱃고동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배가 천천히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품으로 빨려 들어간다. 갑판 위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게이랑에르 마을과 선착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산비탈 경사면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아름다운 집들이 자연 속에 그림처럼 아름답다. 시골인데 시골스럽지 않은 풍경이다. 

U자형 협곡 사이에 바닷물이 푸른 호수처럼 고요하다. 해발 1,500m 산 능선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그 아래에 아름다운 집들이 왼쪽으로 몇 재 보였다. 실처럼 가느다란 폭포수가 여기저기 하얀 면사포처럼 흘러내리듯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말 아름답다. 페리선은 비경이라 일컫는 게이랑에르 피오르드의 품으로 깊숙이 점점 더 들어간다. 

그 순간 요정 같은 어린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를 처음 본 것은 아내였다. 아내 목소리에 피오르드의 절경에서 눈을 돌려야 했다. 천사는 비가 내리고 있는 페리선의 갑판이 아니었다. 갑판에는 찬바람이 세게 불고 있어 천사가 나타날 곳이 아니었다. 천사는 찬바람과 비를 피해 선실 유리창을 통해 밖에 있는 아내를 보고 있었다. 

“어머! 얘 좀 봐. 천사 같아. 정말 예뻐.”

무슨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도 순간 ‘훅’가 버렸다. 들고 있던 카메라를 천사가 나타난 쪽으로 돌려 셔터를 눌렀다. 그런데 나를 보던 천사가 얼굴을 돌려 버린다. 기다렸다 다시 나타난 천사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푸른 눈동자가 너무 매력적이다. 선실 안에 하얀 피부의 중년여성이 어린아이를 앉고 서 있다. 아래 이빨이 2개인 걸 보니 아직 돌이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아이에게 손을 흔들며 카메라를 보라고 손짓을 했다. 천사가 등을 돌리더니 선실 안쪽으로 사라졌다. 천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의 비경 속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정말로 폭포가 많다. 높은 절벽 위에 몽실몽실 나무숲 사이로 우윳빛 실 폭포가 여기저기 걸쳐져 있다. 그 모습이 빨랫줄에 하얀 운동화 끈을 줄줄이 매달아 놓은 듯 실 폭포가 협곡을 타고 길게 걸쳐져 있다. 폭포는 5월의 신부가 입은 드레스처럼 흘러내리는 모습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폭포수가 신비감을 더했다. 

이틀 뒤, 오슬로로 왔다. ‘바이킹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박물관 매점 쪽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아내가 깜짝 놀란 표정을 하면서 나를 부른다. 고개를 돌렸다. 아내가 누군가를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왜 그런지를 알았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페리에서 만났던 “천사”를 바이킹 박물관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드라마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데 말이다. 동그란 눈, 푸른 눈동자, 금발 곱슬머리, 하얀 얼굴의 그 아기가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는 찬바람에 흐린 날씨 탓에 유람선 선실 안에 있었고 아내와 나는 갑판에서 게이랑에르의 절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선실 창문을 통해 그 모습을 처음 보고 나는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고, 아내는 선실로 들어가 그 천사를 만났었다. 

천사와의 만남은 그게 다였다. 그때 아내는 천사를 한번 안아보고 싶어 두 손을 내밀어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아내의 손을 밀어내며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움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천사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우연치고는 너무나 믿기 어려운 우연이다. 그래서 아내는 기절할 듯이 천사를 보고 반가워하며 천사에게 다가갔다. 천사의 엄마도 우리를 알아본 듯 웃는다. 아내는 천사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내가 다시 두 손을 내밀면서 천사를 안아보고 싶은 마음을 내비쳤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천사가 아내에게로 다가오며 안긴다. 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여행이 만들어 준 인연이었다. 짧은 만남이지만 너무 행복한 순간이었다. 여행지에서 만남은 스치는 만남이 대부분이다. 같은 코스의 패키지여행이라면 다시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천사와의 만남은 그런 만남이 아니다. 스치는 만남이기는 하지만 우연이 만든 인연치고는 너무 행복한 만남이다. 천사와의 재회는 북유럽 여행길에서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추억에 남을 것이다

천사와 기념사진을 찍고 나서 다시 천사를 아기 엄마에게 돌려주었다. 아내와 난 웃으며 천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만남이 무엇인지 이별이 무엇인지 이 짧은 순간, 마음이 찡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손을 흔들며 천사가 여행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오늘은 노르웨이 여행 마지막 날이다. 내일 아침이면 오슬로를 떠나는 날이다. 새삼 인연이란 단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만남은 인연이다. 인연을 빼고서는 삶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만남이 아름다운 인연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모든 만남이 아름다운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바람 같은 인연이 많다. 여행은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아름다운 인연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여행에서 스치는 만남이라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으려면 스스로 Happy-Virus를 마음속에 지녀야 한다. 동시에 그것을 다른 여행자와 같이 즐기도록 해야 한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더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당신과 헤어질 때는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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