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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행복, 그대와 춤을

여명에 물든 꽃밭에서

by 훈 작가 2024. 10. 10.

출사 전날, 가을 아침을 만날 생각 하면 설렙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모르는 사람은 뻥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해뜨기 전 여명과 함께 만든 코스모스꽃을 만나 보면 그런 소릴 안 할 겁니다. 설렘을 유혹할 만한 가을빛이 다른 때와 달리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감성이 둔한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습니다.

 

어둠을 덮고 잠든 코스모스밭은 분위기 있는 말로 고즈넉합니다. 행여 꽃들이 잠에서 깰까 봐 나는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이 시간이면 모두 단잠에 빠져있을 때이니까요. 그러나 조금 있으면 아침의 문을 열릴 겁니다. 원래 가을은 여름보다 잠이 많거든요. 성질만 급하면 속만 탑니다. 사진의 시작은 기다림입니다.

 

눈을 뜬 여명이 하늘 처마 끝을 물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코스모스 요정들도 눈뜨고, 가을빛과 더불어 요정으로 변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빛이 내려옵니다. 빨강, 노랑, 분홍, 하얀, 주황으로 예쁘게 단장한 요정들이 일제히 졸린 눈을 비비면서 들녘으로 나옵니다.

 

요정들의 향연, 가을 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축제입니다. 장미가 유혹하는 봄의 무대와 다릅니다. 꽃이 너무 아름다우면 그 아름다움에 주눅 들어 경계하게 됩니다. 하지만 코스모스의 유혹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사랑스러운 이웃집 꼬마 아가씨를 보듯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늘 그렇게 가을에 만났었거든요.

날 보자 요정들이 꽃밭으로 들어오라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망설여집니다.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설렘이 현실이 될 땐 가슴이 뛰거든요. 그러나 꽃밭에 들어감은 거부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유혹일지라도 때론 용기를 내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그런데 사실, 눈치 볼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거든요. 그럼에도 요정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살짝 겁이 납니다. 녀석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자칫 만신창이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꽃밭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슬 머금고 있는 꽃들이 사정없이 달려듭니다.

 

, 차가워.”

 

어쩔 수 없이 뒤돌아 나왔습니다. 순간 난 요정들의 차가운 유혹이 싫었습니다. 마음은 그런 게 아닌데,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한 겁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눈은 감성적으로 반응하는데, 몸은 정서가 아닌 자극에 의한 감각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가을 낭만에 흠뻑 젖었던 분위기가 망가졌습니다.

 

그것도 잠시 마음은 다시 여명의 빛이 내려앉은 코스모스꽃밭으로 날아갑니다. 매직아워 때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풍경, 렌즈를 통해 풍경을 오려 담습니다. 나만의 낭만을 즐기며 행복에 젖어 봅니다. 어차피 행복이란 내가 만들기 나름이니까요. 솔직하게 말하면 새벽 단잠의 유혹을 뿌리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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