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흰머리가 늘어납니다. 오랜 세월 염색을 했었죠. 흰머리를 감추며 조금이라도 나이가 덜 들어 보이도록 애썼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가을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피한다고 피해지지도 않습니다. 자연의 순리를 거부할 수 없으니까요. 인생의 가을 문턱을 그렇게 넘은 지가 몇 년 되었습니다.
흰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인생의 가을, 생경하게 느껴졌던 은퇴라는 단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은퇴는 영어로 ‘Retire’죠. 그럴듯한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달릴만큼 달렸으니 타이어를 새걸로 교체하라는 겁니다. 맞는 말이죠. 낡고 오래된 타이어를 그대로 타고 다니면 위험하니까, 새 걸로 바꾸어 다시 달려야죠.
열심히 달려온 인생, 은퇴하면 새 타이어를 갈아 끼어야 합니다. 인생의 가을은 그나마 달릴만한데, 문제는 겨울이죠. 돈이 아깝다고 교체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춥고 위험한 인생의 겨울, 있는 타이어를 그대로 끼고 달리면 얼마 가지 않아 장례식장으로 곧바로 직진할지도 모릅니다.
노을 지는 들녘에 은빛 억새 물결이 일렁입니다. 아름답습니다. 억새를 보면 인생이란 가을 영화의 주연을 보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억새(Eulalia grass)’ 꽃말은 ‘은퇴’이거든요. 인생의 가을은 현역에서 은퇴하는 시기입니다. 마음은 청춘인데 하고 아무리 우겨봐도 사실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왜 억새의 꽃말이 ‘은퇴(retire)’일까? 억새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억새는 한겨울에도 폭설이 내리지 않는 이상 넘어지지 않습니다. 꽃이 핀 모습 그대로 꼿꼿이 서 있습니다. 은퇴하더라도 허리가 굽은 노인처럼 살지 말고 꼿꼿하게 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오래된 차라도 새 타이어만 갈아 끼면 되는 겁니다.
억새는 들뿐만 아니라 산 능선에서도 잘 자랍니다. 억새는 씨앗이 번져 무리 지어 자라고 뿌리가 강해 둑 같은 경사지에서도 잘 자랍니다. 가을 산에 가 본 사람들은 보았을 겁니다. 산 능선에 억새밭에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도 흔들리고 휘어질지라도 넘어지지 않는 은빛 억새 물결을 보았을 겁니다. 꽃말이 왜 ‘은퇴’인지 이제는 알았을 겁니다.
간혹 억새와 갈대를 혼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억새를 보고 갈대라고. 쉽게 생각하면 산에 있는 것은 억새이고, 하천에 사는 것은 갈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물가에 사는 억새도 있습니다. 그래서 헷갈립니다. 꽃이 은빛이나 흰색을 띠면 억새고, 고동색에 가까운 갈색이면 갈대입니다.
숨을 은(隱), 물러날 퇴(退)의 은퇴(隱退)와 Retire의 의미, 어떤 의미가 마음에 와닿습니까. 퇴직 후 숨어서 한가로이 지내는 은퇴와 새 타이어로 바꾸어 끼고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 조선시대 사람이 아니면 아무래도 후자일 겁니다. 억새의 꽃말이 은퇴라는 사실에 대해 곱씹어 볼 필요가 있는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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