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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그땐 메밀꽃을 몰랐습니다.

by 훈 작가 2024. 10. 9.

 

한겨울 어두운 골목길을 걷노라면 무서웠습니다. 달빛조차 없는 밤은 더욱 그랬습니다. 개 짖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리면 마치 공포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옵니다. 그 시절 골목길은 왜 그리 어두웠나 모르겠습니다. 분위기 있게 전봇대 위에 방범등 하나라도 있었으면 무섭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궁이 굴뚝에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던 시절의 겨울이 그랬습니다. 해가 짧은 겨울밤은 길었습니다. TV도 없던 시절, 까맣게 그을린 아랫목 구들장으로 서로 발을 디밀었던 겨울밤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먼 아날로그 시절로 돌아가면 어느새 아련하게 옛 생각이 납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하려고 그러나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말해야겠습니다.

 

찹쌀 떠--, 메밀 무~

 

한 겨울밤, 10시가 지나면 출출할 때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담장 너머로 들리던 소리입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12시까지 들렸던 소리입니다. 지금이야 야식집도 있고 배달서비스가 있지만, 그 시절엔 치킨집은 시장 골목이나 가야 볼 수 있었던 때입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시켜서 먹을 수 있는 게 찹쌀떡, 메밀묵이었습니다.

 

겨울철에만 한시적으로 영업했던 메밀묵 장수 아저씨의 외침 소리,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한 풍경입니다. 사실 그땐 몰랐습니다. 메밀묵이 메밀꽃 열매로 만드는지. 도토리로만 만드는 줄 알았거든요. 메밀꽃의 존재는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배운 단편소설의 제목 '메밀꽃 필 무렵'으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알긴 했어도 그 꽃을 실제로 보기까진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꽃을 보려고 소설의 무대였던 강원도 평창군 봉평까지 갈 수 없으니까요. 소설 속에 나오는 달밤에 메밀꽃 장면이 어떤지 이해할 수 없었죠, 작가는 소금을 뿌려놓은 듯하다고 했지만, 꽃의 실체를 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메밀꽃을 본 건 은퇴 후였습니다. 그것도 사진을 취미로 배우지 않았다면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그뿐 아니라 메밀꽃을 보고 싶어도 주변에 흔치 않은 꽃이라 보기 힘들었습니다. 일부러 소설의 무대인 강원도 봉평까지 가지 않는 이상 말이죠. 그런 이유로 메밀꽃을 보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메밀꽃을 처음 보는 순간 그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죠찹쌀 떠--, 메밀 무~의 메밀꽃, 아련한 추억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꽃이라 개인적으로는 정감이 가는 꽃입니다. 지금이야 경관 농업으로 메밀꽃을 가꾸고 일부러 구경삼아 많이 찾습니다.

 

메밀꽃이 장관입니다. 꽃을 보니 그 꽃에 서려 있는 정서가 새롭게 느껴집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달밤에 메밀꽃 풍경도 이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금을 뿌려놓은 듯하다고 한 표현이 너무 멋집니다. 그때 몰랐던 느낌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 가을이 지나면 다시 생각날 것 같습니다. 그 시절 그 소리가.

 

찹쌀 떠--, 메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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