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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코스모스 핀 들녘에서

by 훈 작가 2024. 9. 30.

힘들었습니다. 여름 내내. 열대야는 연일 신기록을 경신했죠. 뉴스를 보면 하루라도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세상은 늘 그랬죠. 별별 일이 벌어져도 그때뿐이고, 그게 내 일이 아니면 무덤덤하게 지나치게 됩니다. 서로 어울려 살아야 아름다운 세상인데 저마다 세상사는 게 팍팍하면 마음까지 여유가 없어집니다.

 

하루라도 빨리 가을이 왔으면 했는데 늦더위가 강짜를 부리는 것처럼 가을을 시샘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가을에만 관심이 있으니 물러가기 싫은 가 봅니다. 우린 때가 되었으니 기다리는 것뿐인데 눈치 없는 여름이 고집스럽게 버티는 것 같아 보기 싫습니다. 뭐가 그리 아쉬운 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계절의 시계는 돌아갑니다. 늦었지만 가을이 성큼성큼 우리 곁에 왔습니다. 가을이 온 걸 어떻게 느끼는지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느낄 수도 있고, 짙고 푸른 하늘 때문에 아! 가을인가 하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분명한 건 무더위가 한풀 꺾여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들녘의 가을은 다릅니다. 누렇게 벼가 익어가야 가을이고, 길가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꽃이 피어야 가을 분위기를 느낍니다. 코스모스가 넘실대는 들녘을 가로질러 가는 열차를 보면 마음은 먼 고향마을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가을이 추억을 소환하는 건 아날로그 시대에 젊은 날을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코스모스를 보아야 가을이 온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코스모스는 무리 지어 필 때 아름답게 보입니다. 무리에서 떨어져 핀 걸 보면 외롭고 쓸쓸해 보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냘프게 보이는 꽃인데 왠지 왕따 당한 것처럼 안쓰러워 보입니다. 게다가 눈길이 가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치게 되는 겁니다.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 들판을 보면 걸음이 멈추어집니다. 꽃밭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습니다. 혼자든 둘이든 상관없습니다. 가까이 가 보면 하늘가에 고추잠자리도 맴돕니다. 간혹 호랑나비도 만납니다. 여기저기 다정한 모습의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가을 추억 만들기 바쁜 시간입니다.

그래서 난 가을이 코스모스 핀 들녘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가을은 정서적으로 맛이 싱겁습니다. 그러나 코스모스가 핀 들녘에서 만나는 가을은 맛 다릅니다. 마치 어머니가 담가 준 김치처럼 깊은 고향의 향기가 느껴지고, 나훈아의 <고향 역>이 귓전에 울리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수많은 가을이 우리 곁을 지나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8장의 코스모스꽃을 하나씩 떼어 하늘로 휙 날리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함박 웃는 모습도 스칩니다. 누구든 코스모스 추억이 담긴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친구끼리든, 연인과 함께든, 아니면 고향마을 초입 신작로 길을 같이 걷던 어머니든.

 

수많은 코스모스꽃이 모여 피는데도 시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아름답게 삽니다. 코스모스는 서로 질서를 지키며 꽃의 가치를 추구하며 지냅니다.  오래전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세상은 함께 사는 것이라고. 함께 살아가는 생각이 우리의 가치 기준이라고. 어쩌면 영어로 cosmos라는 말에 우주 말고 질서라는 의미가 이 때문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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