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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아포리즘

은행나무길에서

by 훈 작가 2024. 11. 25.

밤새 떨어진 은행잎이 노랗습니다. 누군가는 노란 카펫같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난 처연한 그 길을 차마 걸을 수 없었습니다. 이별의 상처가 채 가시지도 않은 듯 보였거든요. 그걸 알면서 모른 척하고 걸을 순 없잖아요. 날 속이는 거니까요. 솔직해야 하는데, 그 유혹을 거부하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정말.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낭만자객들이 비정하게 밟고 걸으며 즐거워합니다. 누군가는 노란 카펫을 뜯어 허공에 내던집니다. 그걸 보고 환호성까지 지르면서. 뭐가 그리 즐거운 거죠. 그게 추억이라며 채집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고 합니다. 내 감정을 채우는 것만 행복이라 여기기 때문일 겁니다.

은행나무길을 짓밟는 점령자들이 얄밉습니다. 헤어지는 눈물겨운 순간이 그들에게 낭만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게 나는 싫습니다. 낭만이라고 그렇게 정당화하면 괜찮은 건가요. 당신은 그럴지라도 그게 이가을에게는 억지일 겁니다. 가을의 이별을 공감하지 못하는 거죠. 아픔은 아픔으로 느껴야 하지 않을까요.
 
낭만이란 이름으로 이가을을 당신이 차지하는 건, 단지 스치는 작은 감정일 뿐이죠. 어차피 인간의 감성은 소슬바람처럼 스치면서 잊거든요. 뜨거웠던 사랑이 일순간에 차갑게 식는 것은 시간문제죠. 낭만이란 말은 한순간의 차가운 유혹입니다. 어차피 당신은 겨울이 오기 전에 낙엽이라며 다 쓸어 모아 장례식을 치를 예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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