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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그리움

by 훈 작가 2025. 4. 18.

햇살 좋은 봄날 저녁, 산등선 너머로 해가 진다. 어둑어둑해진 동구밖 저 멀리 밭일 끝낸 희미한 그림자가 보인다. 이윽고 사립문 밖에 헛기침 소리가 안방 문밖에서 들렸다. 아버지가 돌아왔음을 알리는 소리다.
 
가을밤 문살 총총한 안방 문에 어른거리는 달빛 그림자 벗 삼아 울어대던 이름 모를 풀벌레들, 문풍지 울리며 머물던 곳도 안방 문밖이었다. 스치듯 바람이 잠시 머물며 가을의 전설을 들려주던 곳도 바로 안방 문밖이었다.
 
밖에 누가 왔는지 보기 위해 종종 할머니는 안방 문을 열곤 했다. 아침이면 이불을 개고 밤새 머물던 공기를 내쫓느라 안방 문을 열었다. 닫혀 있을 땐 공기조차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했다. 열지 않으면 무엇 하나 볼 수 없었다.
 
안방 밖으로 나오지 못한 숱한 이야기가 안에 갇혀 있었다. 가슴 아픈 사연 누구에게 하소연한 들, 누구에게 외롭다 털어놓은 들, 누가 듣겠는가. 이웃사촌인들 매 사정은 다 똑같은데. 그저 안에서 가슴앓이만 할 뿐.

갈수록 고향을 저버리는 세속의 야속함이 슬프다. 안방 밖에서 들리던 웃음꽃 피는 이야기, 밤마다 뜰 안에서 속삭이던 이슬방울, 초겨울 함박눈이 내리는 날 뜰에서 빗자루로 쓸던 소리, 이젠 먼 하늘의 별이 된 지 오래다.
 
그리움 하나 머문다. 콕 짚어 말하긴 어렵다. 가슴 깊은 곳 피어오르는 뜨거운 눈물, 날 버리고 떠난 세월이 미워질 뿐이다. 봄날 다시 찾아온 햇살은 정겹고 따뜻한데, 왜 그리움이 사무치는가. 왜 이토록 슬픔에 젖어 드는가.
 
난 그리움에 끌려 추억에 빠진다. 눈 감으면 보인다. 봄비 내리고, 솔바람 불고, 그리고 가을 지나 첫눈이 내리던 날. 그러다 이름 모를 새가 외양간 옆 살구나무에 앉아 저 산 너머 소식을 전해주며 그리움 달래 주곤 했다.
 
이제 그 마저 묻고 잊어야 할 듯싶다. 그리움이 물들면 들수록 가슴은 폐허가 된다. 더 이상 무너진 성터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 머물수록 방황하게 된다. 버려짐이 더 이상 그리움의 상처가 되는 세상이 아니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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