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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아포리즘

물구나무 선 봄

by 훈 작가 2025. 4. 15.

코흘리개 시절, 또래끼리 허리를 구부리고 가랑이 사이로 풍경을 보며 놀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늘이 아래로 땅이 위로 뒤바뀐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극히 단순한데도 불구하고 그게 무슨 재미난 일처럼 반복해 놀던 기억이 납니다. 늘 보던 것과 달리 새로워 보이는 게 재미있어 서로 까르르 웃음을 자아냈던 추억입니다.
 
중학교 체육 시간, 선생님은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마주 보게 하고 물구나무를 서게 했습니다. 운동장과 학교 건물이 위로 올라가고 하늘이 아래로 내려온 풍경을 보게 됩니다. 평소엔 그렇게 볼 일이 없는 학교 풍경을 불과 몇 초 동안 넋 나간 듯 보곤 했습니다. 물론 힘들어 오래 버틸 수 없었지만, 뒤집어 본 세상은 새로웠습니다.
 
춘 사월에 눈이 내렸습니다. 살다 보니 별일 다 봅니다. 생각해 보니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기도 합니다. 지구가 기후변화로 자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냥 지나치기엔 예사롭지 않은 일인 듯합니다. 그럼에도 우린 일과성 일로 치부하고 지나갈 겁니다.
 
어쩌면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삶은 늘 머리 아플 정도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일로 가득합니다. 세상은 어린 시절 꿈꾸었던 것과 너무 달라 여유 없는 일상의 반복일 뿐입니다. 예전 보다 살기 좋아졌음에도 나이 들수록 가슴에 품었던 꿈을 잃고 살아가야만 하는 세상인 듯합니다.
 
이젠 그 꿈이 욕심으로 바뀌었고, 때 묻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알기에 춘 사월에 내리는 눈을 마냥 신기하게 바라만 볼 수 없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보다 낭만적이고 문학적인 시선으로 이 봄을 마음에 담았을 텐데 그렇지 못합니다. 내가 사는 동안 봄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어제 내린 눈을 코흘리개 시절처럼 허리를 숙여 가랑이 사이로 이 봄을 보았다면 정말 신기했을 겁니다. 하늘 아래로 눈이 물구나무서듯 펑펑 쏟아져 내린 세상을 보며 우린 땅에 매달려 눈사람을 만들고 온종일 신나게 놀았을 겁니다. 봄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고 아지랑이가 봄비처럼 내리는 꽃동산에서 꿈을 키웠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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