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hoto 에세이/라떼별곡

눈 꽃

by 훈 작가 2026. 1. 8.

겨울은 시련의 시간입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움츠리게 합니다. 사람도 그럴진대 꽃은 어떻겠습니까. 따뜻한 사랑이 있어야 피우는데 이 계절엔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도 가을에 불던 바람은 정감이나 있었죠. 낙엽을 밟을 때마다 사그락거리는 소리는 추운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운치를 느끼게 해 주었으니까요.
 
겨울은 동토의 계절입니다. 겨울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는 자유를 짓밟는 계엄령의 군화 발짝 소리 같습니다. 태양은 이미 따스함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이럴 땐 눈이라도 내려야 포근함을 느끼게 해 주는 법인데 이마저 발걸음이 끊긴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리움 끝자락에 정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눈꽃이 있긴 합니다.
 
혈기 왕성했던 시절엔 겨울 산행을 좋아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하이라이트는 상고대나 눈꽃이었죠. 높은 산을 올라야 볼 수 있어 아쉽긴 합니다. 다른 꽃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오로지 눈이 만들어낼 수 있는 꽃(물론 동백꽃은 예외)이죠.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점심을 먹고 나서 한라산 정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죠. 제주시에서 본 한라산 봉우리가 하얀 고갈 모자를 쓴 것처럼 변했습니다. 이때다 싶었죠. 1,100 고지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겨울 한라산은 두 번 가 보았습니다. 그때 보았던 눈꽃이 지금도 선했습니다. 겨울 동화에나 볼 수 있는 설국이었죠. 그런 풍경을 상상하며 달렸습니다. 작은 설렘이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1,100 고지. 온 세계가 눈꽃을 뒤덮인 풍경을 볼 거라는 마음에 심장이 가슴팍을 세게 두들겨 댔습니다. 모처럼 찾은 제주 여행에서 눈꽃을 볼 수 있다는 셀렘 때문에. 이는 뜻하지 않은 작은 행운입니다. 겨울이 겨울답지 않아 볼 수 없었던 설국을 한라산에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런 생각이 든 겁니다.
 
하지만 그런 흥분은 길지 않았죠. 주차장은 물론 도로까지 여행객들이 타고 온 차들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빙빙 돌다 겨우 겨울 승용차 한 대가 빠져나가는 곳을 발견하고 기다리다 주차했습니다. 이것도 운이라면 운이라는 생각이 들어 반가웠죠. 그만큼 1,100 고지는 상상 이상으로 혼잡했거든요.

차에서 내리는 이곳은 제주도가 아니었습니다. 완전 북극이었습니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부는 데다, 손이 얼어붙을 듯 시렸습니다. 얼굴도 얼어붙는 듯 추웠죠. 그래도 발길은 돌릴 수 없었습니다. 평소에 오기 어려운 설국에 입국했으니까요. 이왕 왔으니 발 도장은 찍고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걸 감수하기로 마음먹을 수밖에 없었죠.
 
눈은 너무 즐거운데 몸은 경운기처럼 ‘덜덜덜’ 떨렸죠. 눈꽃 구경이 마치 극기 훈련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비슷했습니다. 이 모든 게 겨울 한라산의 두 얼굴입니다. 밑에선 가을 같은 겨울 날씨인데 위에선 시베리아 같은 한 겨울이었으니까요.
 
겨울에 피는 눈꽃, 그래도 당신을 볼 수 있기에 겨울은 황량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진정 이 겨울에 꽃다운 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당신을 찾아오는 겁니다. 다만 당신을 자주 볼 수 없어 너무 아쉬울 뿐입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이렇게 높은 곳이 아니라도 자주 봤으면 좋겠습니다.

'Photo 에세이 > 라떼별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억만들기  (10) 2026.01.13
양파  (43) 2026.01.12
삶이 힘든 이유  (14) 2026.01.07
환상 여행  (13) 2026.01.06
무시(無時)로  (22) 2026.01.0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