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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여행이다/미서부

브라이스 캐니언

by 훈 작가 2023. 2. 25.

설렘으로 다가가는 것은 심장을 뜨겁게 달군다. 무엇이 설렘을 만들까?  여행은 설렘을 만나는 것이다. 인천공항에서부터 시작된 설렘이 태평양을 건너 LA공항에 내리면서 짜증으로 변해 버렸었다.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여행객들의 길고 긴 줄이는 아나콘다 뱀 꼬리처럼 이어지며 설렘을 지치게 만들었었다. 긴 시간 동안 이어졌던 지루함은 미 서부여행의 첫날부터 즐거움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그러다 설렘이 다시 생기를 되찾고 살아난 것은 그랜드 캐니언 투어에서였다. 이어지는 미 서부 캐니언 투어는 드라마 연속극처럼 감질 맛나게 끝나고 궁금증을 자아내어 다음 편을 보게끔 만드는 기대와 흥분이 숨어 있다. 그런 까닭에 단잠을 깨우는 모닝콜 소리가 그다지 밉지가 않았다.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투어버스가 KBS 1-TV《걸어서 세계 속으로》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뽀얀 안개가 깔린 깊은 산길로 접어들면서 예고편인 레드 캐넌을 지났다. 여행이 가져다주는 설렘이 서서히 차창 밖으로 다가오며 이국적 풍경이 여행자의 시선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설렘의 자극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떨림으로 이어졌다. 그런 흥분이 시차적응의 피로를 조금씩 무디게 만든다.

내 생애 10월에 만나는 첫눈은 처음이다. 안개와 어우러진 첫눈이 차창 밖에서 휘날리기 시작한다. 브라이스 캐넌에 가는 길목에서 첫눈을 만난 것이다. 왠지 기분이 좋은 날이다. 나와 아내는 기분이 좋아 속으로 좋아서 내심 환호하는데 제이콥 얼굴은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안개로 때문에 캐니언 시리즈 마지막을 장식하는 브라이스 캐니언의 아름 다룬 풍경을 볼 수 없을 까봐 우리 일행이 실망하면 어쩌지 하는 표정이 아닌 가 싶었다. 

여행에 있어서 날씨는 중요하다. 날씨는 신의 영역이다. 제이콥은 신의 영역을 걱정을 하고 있다. 사실 내가 그 보다 걱정했던 것은 비 오는 날씨였다. 다행히도 비가 아닌 눈이어서 한시름 놓았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탓이다. 비기 내렸다면 대략 난감한 상황과 맞이할 뻔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발 2400m 높은 고지대이다 보니 비가 눈으로 변해 내린 것은 하늘이 도운 것이나 다름없다. 사진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상황이라 더욱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날씨가 장난이 아니다. 투어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차디찬 바람이 와락 달려들어 나를 껴안는다. 싫다고 할 겨를 없이 바람막이 옷 안에 숨은 반팔 티셔츠 속으로 들어와 내 속살을 더듬는다. 바람이 국산이 아닌 Made in USA이다 보니 익숙하지 않다. 미국산이다 보니 한결 차갑게 느껴진다. 한국인 자존심으로 체면을 지켜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투어에 나섰다.
  
숲속 길을 지나 Sunset Point에서 브라이스를 만났다. 하얀 이브닝드레스 패션 속에 속살을 숨긴 그녀가 섹시하게 웃으며 반긴다. “Hello!” 하며 인사를 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전혀 내숭 끼가 없어 보인다. 
“Are you here  to see me?” 
당근이지. 
“Do you think I look sexy?” 
물론이야.  아주 멋져 보여. (You look pretty sexy.)
 

하얀 눈이 휘날리는 브라이스 캐넌은 붉은 색조의 첨탑으로 형성된 멋진 협곡이다. 아름다움을 형용하는 말이 많은데 적당한 형용사를 찾을 수가 없다. 몇 년 전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만났던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와 많이 닮았다. 하지만 붉은 색조의 피부색이 이슬람계열의 스타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제이콥이 걱정할 만한 날씨 상황은 아니었다.
  
자연이 만든 걸작은 하나같이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만들어진 것 들이다. 과학적으로 풍화작용이니 침식작용이니 하며 말하지만 그것은 인간들의 논리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니 자연이 만든 작품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다. 자연이 빚어낸 작품에 대해 인간이 평가하는 것 자체가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염없이 눈이 펑펑 내린다. 눈 내리는 배경 속에 브라이스 캐넌 첨탑기둥의 살결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니 브라이스도 오늘 날씨가 차갑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예상치 못한 눈보라 때문에 마음은 더 머무르고 싶은데 몸이 자꾸 채근을 한다. 더 이상 자신을 혹사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말 못 하는 몸뚱어리가 파업을 하면 마음은 더 큰 고생을 한다. 이럴수록 냉정해야만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몸과 마음이 불협화음을 야기시키면 문제가 생긴다. 육체의 주인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의 주인 또한 육체가 아니다. 둘이 조화롭게 균형을 유지해야 온전한 사람으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하는 수 없이 육체의 고달픔에 마음이 한 걸음 물러서 양보하는 수밖에 없다. 불가피한 선택이다. 아쉬움이 남지만 반갑게 맞이했던 첫눈이 불러온 인연을 더 이상 연연해서는 안 될 상황이다.
  
설렘으로 만난 첫눈 때문에 섹시한 브라이스 캐넌과의 데이트는 짧은 만남 긴 이별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차라리 눈 내리는 10월이 아니었더라면 더 로맨틱한 밀어를 나누었을 텐데 하며 떠난다. 여행이 만든 설렘은 때에 따라 눈물겨운 이별의 드라마를 만들곤 한다. 이것이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설렘의 눈물이다. 
  
설렘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지만 설렘의 끝은 이별이기 때문에 여행은 이별을 통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 인간이 성숙하는 과정에는 그에 따른 성장 통을 감내해야 한다. 여행이 가져다주는 성장 통은 인간의 내면을 더욱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나는 여행을 인생교과서라 생각한다.
  
여행은 설렘으로 문을 열고 나선다. 문 밖에서 많은 사람과 다양한 문화를 접한다. 여행은 그런 과정에 성장 통 같은 홍역을 치르면서 색다른 문화를 경험하고 내면의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인생 최고의 선생님이 되어 준다. 사람을 크게 키우려거든 여행을 보내라는 말이 있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여행을 즐기면 삶이 그만큼 행복해지고 내 자신이 성숙해지는 것은 틀림없다. 

카르페 디엠! Carpe 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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