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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보리밭(2)

by 훈 작가 2023. 6. 4.

바다가 보입니다.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푸른 바다가 아닙니다. 들녘에 있는 초록 바다입니다. 바람결에 보리 물결이 춤춥니다. 봄비에 흠뻑 젖은 초록빛이 만들어낸 보리밭이 초록빛 바다처럼 보입니다. 나는 지금 보리가 넘실대는 그 바다를 만나고 있습니다. 조용히 다가가 그 바다를 격하게 안아 봅니다. 

바람이 붑니다. 그가 화가로 변신하여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캔버스에 수채화를 그리듯 현란한 솜씨로 초록빛 파도를 계속해서 그려 넣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봄의 노래를 작곡하여 불러줍니다. 이에 보리들도 그림 속에서 하나가 되어 합창하며 손에 손을 잡습니다. 나는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멍 때리기를 합니다. 

푸른 물결 춤추고 갈매기 떼 넘나들던 그곳에 보리 물결이 춤추고, 갈매기 떼 대신에 하얀 나비들이 넘나듭니다. 어부의 노래처럼 추억이 담긴 보리밭 노래가 마음속에 들립니다. 보리밭 사잇길을 걸어봅니다. 소리 없이 보슬비가 내립니다. 바람에 실린 작은 물방울이 살갑게 볼을 비벼댑니다. 

영롱한 빗방울이 보리에 매달려 같이 놀자 졸라댑니다. 앙증스러운 빗방울의 장난에 보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내버려 둡니다. 그러자 너도나도 빗방울이 달려들기 시작합니다. 녀석들의 어리광스러운 행동이 내심 싫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초롱초롱 맺힌 빗방울들이 별빛처럼 보이고, 때론 밤하늘의 반딧불처럼 반짝입니다. 

예전엔 농담 삼아 보리밭 근처만 가도 술에 취한다고 손사래 쳤는데 지금은 나도 모르게 보리밭이 그려낸 유혹 속으로 빠져듭니다.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보리밭이 만든 순결한 마음을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무너진 걸 후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든 힐~링의 유혹은 거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정신 차리고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초록빛 파도를 서~핑하듯 누비면서 보리밭을 담아봅니다. 렌즈 안으로 빨려드는 보리 물결에 빼앗긴 마음을 가다듬어봅니다. 흔들린 마음을 애써 되돌려 보지만, 이내 그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황홀한 오후 시간, 데이트는 달콤할 수밖에 없습니다. 난 이대로가 좋습니다.

보리가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합니다.

“보리의 삶을 모르시죠. 솔직히 말해보세요. 관심이 있긴 하나요. 말 안 해도 괜찮아요. 다 아니까요. 지난겨울이 생각나세요. 저는 얼어붙은 땅속에서 긴 시간을 보냈어요.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죠. 땅 위에서도 코로나 때문에 힘들었다는 소리를 우리도 들었어요. 그런데 삶은 언제나 희망을 버리지 않고 견뎌내는 거죠. 보리도 마찬가지예요.”

듣고 보니, 지난겨울을 까마득히 먼 과거처럼 망각의 무덤 속에 묻고 말았습니다. 시간의 과거는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난 그것도 모르고 무언가에 홀린 듯 바람과 함께 누운 보리밭의 애정행각만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보리의 삶에 담긴 소중한 가치를 나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봅니다. 보리는 우리에게 무얼 말하려는 걸까. 

벼가 익으면 머리 숙이듯 보리도 익으면 머리를 숙일 줄 알고 있습니다. 속세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인간도 이는 알고 있습니다.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따라야 하는 걸 보리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거친 환경 속에서도 보리는 자연을 탓하지 않으며 순응합니다. 우리도 보리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삶에 있어 소중한 가르침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에 대한 삶의 이치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으로 치면 겸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겸손이 미덕인 걸 알면서도 많은 이들이 외면하며 오만을 버리지 못하고 탐욕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합니다. 탐욕 속에 행복이 없는데, 왜 그걸 좇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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