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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여행이다/동유럽

할슈타트의 달

by 훈 작가 2024. 5. 24.

할슈타트로 가는 동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알프스의 산자락이 어둠 속으로 잠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할슈타트는 찰츠카머구트의 진주라고 할 정도로 절경을 자랑하는 마을이다. 그런데 해는 이미 침몰해 버렸다. 빛이 사라진 시간에 도착하면 사진에 대한 기대치는 물거품이 된다. 인솔자는 오후 4시면 해가 진다고 했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벌써 저녁 무렵 같다. 투어버스는 S자 커브 길이 많은 산길을 빠르게 갈 수도 없다. 제시간에 도착해도 오후 4시 30분이나 되어야 할슈타트에 도착한다.

여행 전 인터넷으로 본 할슈타트의 모습은 여행의 즐거움을 느끼기에 매력이 넘쳐 보였다. 할슈타트 호수 변에 아기자기한 집들이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마을처럼 아름다웠다. 상상했던 로망이 현실이 된다는 사실 만으로도 여행은 행복이다. 상상에만 머무르면 여행이 아니다. 설렘 속에 있던 할슈타트를 얼마 지나지 않으면 만나게 된다. 지금이면 심장이 뛰며 기대감이 요동을 쳐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도 마음은 빙하처럼 얼어붙는다. 어둠이 물들면 동화 속 마을 풍경이 드라큘라 마을처럼 보일 것 같아 속상했다.

마음을 비우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며 마음을 다독인다. 찰츠카머구트의 ‘진주’라는 표현에서 ‘진주’를 빼 버리면 마음은 편하다. 쉬운 일이 아니지만, 비워야 한다 생각하며 눈을 감아본다. 살다 보면 이런 날 저런 날 있는 거야 하며 다시 눈을 뜨고 어둠 깔린 차창 밖 풍경을 쳐다보았다. 크고 작은 호수의 그림자가 자주 보이더니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깊은 산속으로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다 갑자기 인솔자가 일어서더니 할슈타트에 다 왔으니 내릴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짙은 안개가 깔려 있다. 건너편 산 능선이 희미하게 실루엣처럼 보인다. 길이 미끄럽다. 눈이 얼어붙어 걷기 불편하다. 마을로 가는 길이 호수 왼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포토존을 찾아 걸음을 재촉했다. 인증 사진을 담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나 마음에 두었던 사진은 그림의 떡일 것 같다. 그보다도 자칫 인증 사진마저 담기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순간 포토존을 찾아가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마을 안쪽으로 몇 걸음 더 올라가다가 이내 마음을 접었다.

전깃줄에 줄줄이 매달린 동그란 가로등에 불이 들어와 있다. 안개에 잠든 할슈타트는 몽환적인 분위기다. 무료함을 달래려 하릴없이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안개가 더 짙어져 간다. 투어버스가 정차했던 곳 뒤로 보였던 하얀 산줄기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할슈타트의 호수는 안개로 덮여 있어 볼 수 없다. 마을 쪽 길가에 붙어 있은 호숫물만 보인다. 그 물에 가로등 불빛이 잠기어 흐느적거리며 춤춘다. 할슈타트의 호수는 숨이 멎은 듯, 안갯속에 파묻힌 채 알프스의 품에 안겨 여행객을 본 척하지도 않았다.

좀 더 안쪽으로 걸었다. 짝사랑은 여기까지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가 봐. 마음만 아프지. 맞아. 애초부터 나 홀로 그리워했던 사랑은 불임의 사랑이었어. 그래도 먼 길을 찾아왔는데 먼발치에서나마 임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외면하니 아쉬움이 많지. 짝사랑은 끝내 허공만 떠돌다 보이지 않는 눈물만 삼키는 법. 그래 어쩔 수 없어. 이쯤에서 내 영혼을 위로해 주어야 해. 상념은 늘 마음을 괴롭혔지. 이젠 가슴에 묻었던 마지막 남은 로망을 호수로 던져 버리는 거야.

비웠다고 생각하는데 카메라가 무겁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아쉬움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인가. 비웠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이었나. 아니 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거지. 마음을 어떻게 비워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건가. 솔직하지 못한 마음이 자꾸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게 했다. 할슈타트를 향한 짝사랑이 뭐길래 이러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 미련을 가지면 안 된다. 가능하지도 않다. 에둘러 포기해 버린 마음, 왜 이리 흔들리는가. 나는 애꿎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허무한 마음을 달래듯 자꾸만 시선은 호수로 날아간다.

바로 그때였다. 호수 건너편 산 능선 위로 하얀 달이 떠올랐다. 짙고 푸른 밤하늘에 뜬 달빛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얗다. 순백의 요정을 닮은 듯한 달이 할슈타트 하늘에 나타난 것이다. 마치 영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을 처음 본 것처럼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세상에 어쩜 저렇게 하얀 달이 있을까 싶다. 지금껏 보았던 그런 달이 아니다. 무엇이 이토록 달을 하얀 천사처럼 만들었을까. 동화 같은 마을이라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변신해 온 게 아닐까.

우윳빛 안개가 덮은 호수는 무대가 되었다. 달빛이 발레리나의 의상처럼 너무 아름답다. 그 빛이 호수로 내려온다. ‘백조의 호수’ 무대가 펼쳐지는 것 같다. 주인공 발레리나가 춤추듯 달그림자가 호수면 위를 사뿐사뿐 뛰더니 하얀 나비처럼 날고 있다. 맞다. 알프스의 호수와 달이 연출한 차이콥스키의 ' 백조의 호수'의 무대처럼 한 편의 발레공연 같다. 나는 공연이 펼쳐지는 러시아 볼쇼이 극장의 객석에 앉아 있는 것 같은 황홀한 설렘 속에 빠져든다. 환상이 때론 현실이다. 서운했던 마음이 확 달아나는 버린다.

자연은 경이롭다. 결코 공허한 말이 아니다. 감동이 한순간에 상념을 날려버렸다. 조금 전까지 우울했던 마음이 어디로 간 것일까. 그 공간에 감당하기 어려운 두근거림이 심장을 흥분시킨다. 황홀하다는 말을 해도 좋을까. 이게 맞는 표현일까. 지금은 꺼낼 수밖에 없는 단어다. 생각하지도 못한 깜짝 선물을 주려고 할슈타트는 여행자를 위해 속마음을 감추고 있었는지 모른다. 한편의 단편 소설에서 나올 법한 반전의 장면이다. 소설의 한 장면이라면 이를 쓴 작가는 자연을 만든 신(神)밖에 없을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죄가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을 향한 열정이다. 오로지 그 한 사람을 위한 순수한 마음이기에 아름답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아프다. 사는 동안 다시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아픔을 책망하며 우리는 사랑을 배운다. 헤어지기 전 할슈타트의 여신 같은 달을 카메라에 정신없이 담았다. 달콤한 첫 키스의 추억인지, 아니면 첫사랑의 아련한 그리움인지 격하게 포옹하듯 셔터를 눌렀다. 감미로운 밀애를 즐기는 것처럼 가슴은 떨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별은 가혹하다. 아쉬움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도, 춘향전에 나오는 사랑도 아니다. 일생에 한 번 있을 것 같은 사랑과 이별일 것이다. 슬픈 영화에나 나오는 극적인 눈물은 없다. 단지 가슴에 살며시 다기와 그리움만 남기고 떠나는 눈물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상처받는 이별과 달리 여행이기에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고 싶은데 시간은 내 편이 아니다. 가혹하다고 하는 말은 이 때문에 꺼냈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다견우와 직녀의 이별처럼 아쉬움을 두고 가야 할 것 같다. 이별의 아픔은 사진으로 기억될 것이다. 훗날 다시 사진으로 만나면 그때 그 감동이 다시 날 행복으로 이어 줄 것이다. 감동은 순간이지만 사진은 살아 있는 동안 내 삶 속에 영원하다. 추억은 머리로 기억하는 것보다 사진으로 담아 가슴으로 간직하다 먼 훗날 보면 나도 모르게 행복으로 다시 만난다. 여행의 추억은 사진과 글이 있어야 제맛이 난다.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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