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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여행이다/동유럽

블레드 호수

by 훈 작가 2024. 6. 1.

안개 낀 풍경이 차창 밖을 스치고 지나간다. 짙은 안개 때문에 먼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알프스산맥을 끼고 있는 오스트리아나 슬로베니아는 자연 경치가 좋은 나라다.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알프스의 안개가 참 얄밉다. 여행객들이 아이 쇼-핑 하는 걸로 하늘이 착각하는 모양이다. 오스트리아에서 국경을 넘어 슬로베니아로 들어오기 전까지 그랬다. 안개는 계속 이어졌다.

국경을 통과하면 달라지겠지. 그런데 아니다 점점 더 상황이 안 좋아진다. 이젠 희미하게 보였던 풍경마저 완전히 삼켜 버렸다. 그때부터 차창 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돌려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솔자는 슬로베니아에 대한 설명을 열강 하듯 토해 냈다. 꼭 백과사전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읽어 내려가는 느낌이다. 다른 인솔자와 달리 유머 감각이 완전 꽝이다.
 
슬로베니아에 대한 설명이 끝난 후 그가 말을 이었다. 동유럽 여행코스에서 발칸반도 쪽에 있는 나라들은 한국인 현지 가이드가 없다는 것이다. 없는 이유는 이들 나라들이 다른 동유럽 나라들에 비해 개방이 늦다 보니 현지 교민이나, 한국인 유학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인솔자인 자신이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칸반도 3개국(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은 인솔자인 자신이 해당 나라의 현지가이드(방문국 현지인 가이드는 법적 의무 사항이라고 함)와 같이 설명하고,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만 한국인 현지가이드가 설명할 것이니 이 점에 대해 오해 없기를 바란다며 미리 양해를 구했다.
 
빗방울이 투어버스 차창에 사선을 그으며 흔적을 남기고 ‘휙’ 날아간다. 설마 했는데 인솔자가 알려 준 일기예보가 빗나가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는 일이 걱정된다. 아름다운 블레드 호수, 블레드 섬, 그리고 블레드 성에서 내려다보는 블레드 호수의 풍경은 상상만 해도 흥분되고도 남는데. 아! 제발 비야, 멈추어다오. 

여행길에 비는 불청객이다. 반갑지도 않은 손님이 찾아오면 싫어도 내색할 수 없다. 하늘을 보아하니 상황이 반전될 것 같지 않다. 20분만 가면 블레드 호수에 도착할 것이라는 인솔자의 말이 있었다. 굵은 빗방울이 아니라서 다소 마음은 놓였다. 제발 그만 비가 그쳤으면 좋으련만, 희망 사항일 것 같다. 마음만 까맣게 타들어 간다.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를 출발한 지 1시간 10분 만에 블레드 호수에 도착했다. 인솔자가 우산을 갖고 내리라 한다.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잠시 망설이다가 카메라를 패딩 안으로 감싸 안으며 나만 우산 없이 내렸다.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꺼내 블레드 섬을 보고 연습 삼아 셔터를 눌러본다. 

사진은 그때그때 감각에 의존해야 할 것 같다. 가급적 비를 덜 맞으며 찍는 게 최선이다. 그 사이 어디선가 나룻배 두 척이 나타났다. 이걸 타고 들어간단 말인가. 순간 묘한 기분이 스쳤다. 나룻배를 동유럽 여행에서 만나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생뚱맞게도 눈앞에 펼쳐졌다. 나룻배와 블레드 섬,  어딘지 모르게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듯싶다.
 
뜬금없이 나타난 나룻배는 K-pop 무대에 등장한 트로트나 다름없다. 나룻배와 뱃사공을 블레드 호수에서 마주하니 먼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 어딘지 모르게 현실과 많이 동떨어진 분위기다. 하지만 꼭 부정적인 느낌만 드는 것도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묘한 느낌이다. 나름 낭만적이라 받아들이자. 여행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뭐 그런 걸로 말이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할 유물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런 걸 배라고 타고 다닌다. 어쩌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볼거리가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인솔자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나룻배에 승선할 인원을 배정하고, 승선에 따른 안전과 주의사항을 우리에게 설명했다. 
 
호수는 짙은 안개를 머리에 모자처럼 쓰고 여행객을 맞이한다. 호수와 섬이 그림처럼 시선을 사로잡는다. 멋진 수채화 같다. 맑은 날씨였다면 호수 뒤쪽 멀리 알프스의 산자락이 멋지게 어우러져 보였을 텐데. 안타깝게도 알프스 풍경은 비구름과 안갯속에 묻혀 깊은 잠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룻배 한 척에 16명이 탔다. 안쪽부터 2명씩 배로 올라가 서로 마주 보며 앉는다.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뱃사공이 차례로 타는 걸 도와준다. 나룻배는 비가 들치지 않도록 지붕이 있다. 앉아서 블레드 섬을 바라보니 안개 낀 호수 분위기와 함께 블레드 섬이 화룡점정 같은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백인 사공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우리는 두 척의 나룻배가 호수로 향했다. 뱃사공은 얼굴이 매우 밝았다. 어눌하지만 가벼운 한국말로 인사도 했다. 우리도 웃으며 인사를 받으며 인사를 했다. 인솔자가 말하기를 어지간한 한국말은 다 알아들을 정도의 수준이란다. 그만큼 한국인 여행객이 많다는 이야기일 게다.

인솔자 말에 따르면 이곳에서 운영되는 나룻배는 딱 23척이란다. 더 이상 늘리지 못하도록 오래전부터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노조도 만들어 나룻배 이용에 대한 요금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올릴 수 있고, 자신들의 요구가 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파업도 하며, 뱃사공은 자손대대로 그들 집안에서만 할 수 있도록 상속이 된다고 한다. 
 
뱃사공을 유산으로 물려준다니 이게 말이 돼. 귀를 의심했다. 인솔자는 계속 이어 갔다.  그들의 연간 수입이 우리 돈으로 1억 원이 훨씬 넘는다고 한다.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금수저가 따로 없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이 뱃사공인데 정말 뱃놈이라고 우습게 보다가는 망신당하기 딱 맞을 것 같다. 인솔자는  한술 더 떴다. 뱃사공이지만, 자신의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며 수입도 괜찮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니겠냐며 자기도 이런 직업이 있다면 다 내팽개치고 하겠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이곳을 ‘알프스의 푸른 눈동자’라고 한다. 블레드는 이미 1,000년 전부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왕족, 베네치아 귀족들이 휴양을 위해 찾았던 곳이다. 호수는 동유럽 발칸반도에서 손꼽히는 명소 중의 하나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 만들어진 호수로 해발 501m 분지에 있으며, 길이 2km, 폭 1.3km, 둘레 6km, 깊이 30m나 된다. 
 
여기서 나룻배는 플레트나(Pletna)라고 부른다. 블레드 섬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슬로베니아 전통 나룻배다. 섬까지 멀지 않다. 잔잔한 물결이 바람결을 일렁인다. 사공은 노를 저으며 이를 거슬러야 하는 탓에 나룻배는 우둔하게 움직인다. 양손에 노를 쥔 사공은 균형을 잡고 능숙하게 노를 저어 조금씩 앞으로 움직여 나아갔다. 
 
뱃사공은 18세기부터 이어졌고 오직 남자에게만 할 수 있도록 허용이 되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재임 시절부터 오로지 23척의 플레트나(Pletna)라는 전통 나룻배만이 오갈 수 있게 했다고 한다. 뱃사공이 노를 저어 10여 분 남짓 플레트나(Pletna)를 타지만 은근히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천혜의 휴양도시다. 옛날부터 유럽 귀족들과 부호들이 별장을 짓고 머물면서 휴양을 즐겼던 곳이다. 현재 호텔로 사용되고 있는 빌라 블레드(Vila Bled)는 구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의 티토 대통령 시절에 세계 각국의 정상급 국빈을 영접하였던 곳으로 북한 김일성 주석이 그의 아들 김정일과 3일 머물렀다가 호수 절경에 심취해 일주일을 더 머물렀다는 얘기가 있다. 이 때문에 김일성 별장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성당은 슬로베니아 인들의 결혼식 장소로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이 결혼식장에 들어가기 전에 신랑에게는 한 가지 Mission(수행 과제)이 주어지는데 신랑이 신부를 안은 채 성당 앞에 놓인 계단 99개를 단번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인솔자가 이 말을 하면서 부부끼리 온 팀은 남편 되시는 분이 부인을 안은 채 올라가라는 것이다.
 
삐걱삐걱 사공이 노 젓는 소리가 마치 현악 2중주 연주곡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하지만 10여 분도 지나지 않아 끝났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99개로 이루어진 계단이 여행객을 기다린다. 그 언덕 위에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인솔자의 장난 섞인 설명이 흥미를 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결혼식 날 신랑은 변강쇠 같은 힘자랑 퍼포먼스가 있나 보다. 결혼식장에 가보면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풍경이 연출되는 볼 수 있다. 신랑이 신부를 안은 채 앉았다 일어섰다 동작을 사회자의 구호에 따라 ‘하나’ 하면 앉고 ‘둘’ 하면 일어서는 퍼포먼스를 본 적이 있다. 결혼식의 풍경도 예전과 달리 많이 변했다.
 
계단을 오르니 성모 마리아 승천 성당이 반긴다. 인솔자 설명에 따르면 원래 이곳은 슬라브인들이 시바 여신을 모시던 신전이 있었던 곳이란다. 신전은 8세기에 그리스도교를 위한 성당으로 만들었고, 내부에는 ‘행복의 종’이 있는데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이 남편을 기리기 위해 이 성당에 종을 달기를 원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로마 교황청이 그녀를 위해 종을 기증하면서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녀가 남편을 기리는 마음처럼 ‘행복의 종’을 치면 사랑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에 젊은 연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런 이유로 이 성당의 종을 치려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구경하려면 별도로 입장료(EURO 6)가 있다. 성당 건물의 외관이 수수해 보인다.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라고 하는데 건축양식이나 건축미술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성당의 건축물 대한 뚜렷한 특징이나 차이를 잘 모르겠다. 그저 종탑이 뾰족한 것으로 보아 성당임을 짐작할 뿐이다.
 
호수 건너편에 블레드 성이 보였다. 절벽 위에 보이는 성의 지붕이 희미하게 붉은 색채를 띤 것 같다. 그 아래쪽에 별장으로 보이는 흰색 건물과 베이지색으로 보이는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성이 차지하고 있는 절벽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였다. 맑은 날씨라면 블레드 성이 선명하게 배경으로 들어갈 텐데 조금 아쉬웠다.
 
그사이 다른 관광객들이 섬에 들어왔다. 호수 쪽을 보니 2척의 나룻배가 블레드 섬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섬 안에서 호수 주변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보니 블레드 호수는 누구나 빠져들 만한 매력적인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 호수는 겨울을 제외하고 언제나 수영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호수 북쪽 수면 아래로부터 자연 온천수가 솟아나기 때문이다. 

떠날 시간이 되었다. 나룻배로  섬을 빠져나오면서 나룻배에서 뒤를 보며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림은 멋지게 나오는데 삐걱거리는 나룻배의 특성상 수평 구도를 잡을 수 없어 난감하다. 왼쪽 오른쪽 기우뚱하며 움직이는 무게중심 때문에 찍는 사진마다 수평 구도가 맞추기가 힘든다. 그래도 애쓰며 셔터를 누르고 또 눌렀다.
 
그나저나 빗줄기가 굵어져 간다. 좋게 생각하면 운치가 느껴진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엔 걱정이 태산이다. 왜냐하면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눈으로만 추억을 남겨야 하는 상황이면 여행이 너무 아쉽다. 게다가 기행문을 쓰려면 사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걱정이다.  이럴 땐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호수면 위로 떨어지며 많은 원이 그려진다. 빗방울이 만든 동그라미와 ‘삐걱, 삐걱’ 노 젓는 소리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윽고 플레트나(Pletna)가 멈추었다. 조금 전 보다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다행인 건 블레드 섬 투어가 끝났다는 사실이고, 걱정인 건 이어질 블레드 성 투어다. 아!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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