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장편소설

별을 죽인 달(7)

by 훈 작가 2023. 7. 5.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변호사
  
   승용차가 반포대교를 건넜다. 차가 서울중앙지방법원을 지나 교대역 사거리에서 우회전했다. 모녀가 탄 차가 이면도로로 접어든 후 한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지하 1층에 주차 공간이 없자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Anna는 차를 엘리베이터 연결 복도 가까운 곳에 주차했다.
  변호사 사무실은 10층 복도 끝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Anna가 먼저 사무실로 들어갔다. 박 사무장이 Anna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가 “잠깐만요.” 하면서 변호사 집무실로 들어갔다. 안경을 쓴 여자가 나오더니 Anna를 포옹하며 등을 토닥거려 주며 맞이했다. 
“자, 들어갑시다.”
그녀가 모녀를 집무실로 안내하며 들어가 자리를 권했다.
“그간 어떻게 지냈어요?”
“본의 아니게 다른 때 보다 방콕 생활 좀 했습니다.”
“아휴~ 이걸 어떡해? 아주 답답했을 텐데.”
“아니에요, 변호사님! 집순이 생활만 한 건 아니에요. 피트니스 클럽은 꾸준히 다니거든요. 참, 변호사님! 저의 어머니세요.”
“안녕하세요? 김재형입니다.” 
김재형 변호사가 집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명함을 꺼내 Susan에게 건넸다. 
“Susan Edward라고 합니다.”
“어머! 어머니 어쩜 이리 고우세요.”
“우리 어머니 예전에 미스코리아 선이셨어요.”
“Anna야! 그런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어.”
“사실이잖아. 엄마!”
“Anna 양이 어머니를 닮아서 미인이시구나.”
“어머님 뵙고 보니 세상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부끄럽습니다.”
“한국엔 얼마 만에 나오신 거예요?
“삼십 년 됐습니다.”
“그럼, 정말 오랜만에 오신 거네요.”
“사실 조국을 등지다시피 했죠. 말 못 할 사정도 있고요.”
그 사이 사무실 여직원이 노크하고 들어와 음료는 어떻게 준비할지 물었다. 모녀가 커피라고 하자 김재형 변호사가 커피 석 잔을 부탁했다. 
“Anna 씨! 전부터 불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실례인 것 같아서 물어보지 못한 게 있는데….” 
“변호사님! 뭔데요?”
“어떤 인연으로 청와대에서 근무하시게 된 거예요?”
“얘기가 좀 긴데, 괜찮으시다면 말씀드릴게요?”
“전 괜찮아요.”
  Anna가 이야기를 막 시작하려는데 여직원이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김재형 변호사가 두 사람에게 커피를 권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신 후 잔을 내려놓았다. 

“정말 우연이었어요.”

  Anna는 MIT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고 동 대학원에서 인공지능 Soft Ware 관련 논문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를 받던 날 오후 MIT 대학원에서 ‘인공지능과 미래 사회의 변화’란 주제로 특별 세미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MS의 창립자인 Bill Gates 회장이 토론 주제 발표자로 참석했다. 
  세미나에 참석한 토론자들은 Bill 회장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Anna와 Bill 회장도 격론을 벌였다. 세미나가 끝난 후 Anna는 Bill 회장을 찾아가 토론과정에서 자신의 언행이 무례했다면 사과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오히려 Bill 회장은 그 자리에서 Anna에게 같이 일하는 게 어떠냐며 입사를 제의했다. 
  Anna가 Seattle에 있는 Microsoft 본사에 근무하게 된 계기다. 그녀가 AI 개발팀을 맡아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정보통신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전직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으로 워싱턴 일정을 마치고 귀국 마지막 일정에 MS 본사 방문과 Bill 회장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견학 후 면담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통역을 맡았던 한국 측 수행원이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대통령 당선인은 당황했다. Bill 회장은 대통령 당선인 배려차원에서 면담을 중단하지 않고 배석했던 비서를 통해 Anna를 급히 불렀다. 
  Anna가 면담 장소인 접견실을 찾았다. 전직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녀가 통역을 맡으면서 면담은 원만하게 끝났다. 면담이 끝난 후 전직 대통령은 Anna에게 관심을 보이며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Anna는 외모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무슨 업무를 하느냐 질문에 AI 개발 업무라고 대답한 것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그가 취임한 후 워싱턴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직원이 Anna를 찾아왔다. 청와대에서 지시받았다는 그가 신설된 IT산업 경제 비서관 자리 맡아달라는 대통령의 뜻을 전했다. Anna는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이후 모든 조건을 수용할 테니 재고해 달라는 요청을 두 차례나 더 해 왔다. Anna는 뜻이 없다고 거듭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조국의 미래를 위해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대통령의 친서를 받았다. Anna는 고민했다. 주말을 이용해 San Francisco에 날아가 자신의 문제를 어머니와 상의했다. Susan은 반대했다. 미래의 꿈을 이루기에는 한국의 IT산업 기반이 취약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한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편견과 성(性) 차별을 더 걱정했다. 
  Anna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행을 선택했다. Anna는 대한민국을 알고 싶었다. 그녀는 고민 끝에 이 기회가 아니면 조국이 어떤 나라인지 경험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Anna는 자신의 정체성과 한국인의 피를 이어준 대한민국의 알고 싶었다. 처음에는 마음에 없었지만,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찾아오면 어떻게든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Anna 사건만은 자신이 없었다. Anna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건을 맡고 싶지 않았다. 이미 서초동 법조타운에 소문이 다 돌았다. 사건도 이길 확률도 없으니 시간 낭비라는 생각도 들었다. 
  Anna는 다른 피해 여성과 달랐다. 대부분의 피해 여성은 자신이 죄지은 것처럼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Anna는 정반대였다. 그녀가 처음 찾아왔을 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니 포기하라고 설득하고 만류시켰다. 그러나 Anna는 대한민국은 정의도 없고 헌법도 죽었냐며 반문했다. 김 변호사는 할 말이 없었다.
  김 변호사는 그녀가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Anna가 소송을 진행하다 보면 언젠가 스스로 지쳐 포기할 것으로 생각했다. 한국 내 물정을 스스로 깨닫게 되면 서울을 떠나겠지, 생각하며 Anna 사건을 맡았다. 이런 이유로 의뢰인 Anna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Anna는 스치는 인연일 것이라 여겼다. 많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그랬다. 대개는 스스로 포기했다. 너무 안타까웠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왜 부질없이 이런 소송에 매달려야 하는지 괴로웠다. 수입도 별로였다. 무엇보다 피해 여성 자신이 의지가 약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Anna가 어머니와 같이 왔다. 김재형 변호사는 Anna를 이해하고 싶었다. 왜 어머니와 같이 왔을까?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생각해 보았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외로웠나 보다. 변호사로서 갑자기 Anna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Anna는 정말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승소 여부를 떠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그간 편견을 갖고 Anna를 만났다. 거기에 전임 대통령 측의 회유도 있었다. 법조타운 대부분 변호사가 이 때문에 Anna 사건을 맡지 않으려고 했다. 김 변호사는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말을 꺼냈다.
“Anna 씨! 처음엔 몰랐어요. Anna 씨 마음을…”
“무슨 말씀이세요? 변호사님!”
“Anna 씨가 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렇게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지, Anna 씨 이야기를 듣고 어머님을 뵈니까, 이제야 조금 이해돼요. 조금 일찍 Anna 씨 마음을 헤아렸으면 좋았을 텐데…”
“변호사님!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Anna 씨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조금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Anna 씨는 모든 걸 혼자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한 여자죠. 남에게 의지하거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지금에서야 알았어요.”
“사실 힘들었어요. 제가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싸움을 시작하고 보니까 강한 게 아니라 강한 척만 했던 거 같아요.”
“진작 Anna 씨 마음을 알았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아닙니다. 변호사님!” 
“상황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우리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 봐요. Anna 씨의 용기에 저의 열정을 더해 한번 싸워 봅시다.”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옆에서 듣고 있던 Susan이 김재형 변호사에게 물었다. 
“변호사님! 승소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요?”
“안타깝지만, 없어요.”
김재형 변호사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변호사님!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어머니! 상식이지만 소송에서 이기려면 피의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있어야 하잖아요. 물증을 확보하려면 최단 시간 내의 법원에서 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압수수색에 들어가야 하는데 검찰은 아예 꿈쩍하지 않았어요. 사건에 대한 공소 유지에 전혀 의지가 거의 없다는 뜻이죠. 유일한 증거는 전임 대통령이 보낸 휴대전화 문자와 사진이죠. 문제는 재판부가 이를 증거로 인정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점입니다.”
“변호사님 말씀 듣고 보니 가슴이 탁 막히네요.”
“Anna 씨가 저를 찾아왔을 때 무모한 싸움이니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죠. 그런데 Anna 씨는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사법부의 정의가 살아있는 걸 꼭 봐야겠다는 의지가 강했어요. Anna 씨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죠. 대부분 성 피해 여성들은 음지로 숨기에 급급한데 Anna 씨는 달랐어요. 모든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평생을 고통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있는 그대로 그때 Anna 씨에게 사실대로 말해 주었죠. 이미 Anna 양 사건에 대한 소문은 서초동에 다 돌았어요. 제가 이 사건을 맡은 사실이 알려지자 그쪽에서도 전화가 왔었죠. 웬만하면 시간 낭비하지 말라더군요. 심지어 그들은 내 약점을 잡으려고 내 뒷조사까지 했어요. 어머님! 제 기분 이해하시겠어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Anna 양한테 설득당한 거예요. Anna 씨가 당당한 논리로 저에게 말하는 걸 보고 변호사로서 이 사건을 피하는 게 부끄러워 힘닿는 데까지 해 보자 생각하고 사건을 맡았죠.”
“그러셨군요.”
“여자로 사는 게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피해자는 죄지은 듯 살고, 가해자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거나 증거 불충분으로 나오면 그만이죠. 이게 현실입니다.”
  Susan은 불현듯 지난날의 굴곡진 자신의 삶이 스쳐 지나갔다. 남·여 간 양성평등의 길이 왜 이토록 어려운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재형 변호사는 대한민국 사회가 적어도 성 문제에 관한 한 선진국이 되려면 남성들의 여성을 바라보는 가부장적인 시각부터 바꿔야 한다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요즘은 법 만능주의라 할 정도로 모든 문제를 법으로 해결하려는 인식이 너무 강해요. 도덕과 윤리가 우선시 되어야 하는데 법적으로 위법하지 않으면 모든 게 정당하다는 생각이 사회 전반에 깔린 거죠. 이게 심각한 문제라고 저는 생각해요. 사실 선진국이란 개념은 경제적인 관점도 있지만 그보다 정치와 문화 그리고 국민의 윤리나 도덕적인 수준이 성숙하여야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경제적 측면에서만 보려는 경향이 많아요. 국민 의식이 성숙해야 남성들의 잘못된 성(性) 인식이 근절될 것이고 여성들이 인권침해 사건이 줄어들 거라 저는 보거든요.”
“그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변호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 Anna가 참 훌륭하신 변호사님을 만난 것 같네요.” 
“어머님! 지금 Anna 씨가 처해 있는 상황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든요. 정말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러울 겁니다. Anna 씨 따뜻하게 감싸주세요. 제가 보기엔 Anna 씨는 요즘 보기 드문 멋진 여자예요. 게다가 얼굴도 어머님 닮아서 미인이잖아요.”
“감사합니다.”
“참고로 하나 더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  
“며칠 전 해킹을 당했어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Anna 씨 사건을 맡고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하나 전임 대통령 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사람들 그렇게 하고도 남죠. 해커가 모든 파일을 다 뒤져 보았더라고요. 아! 저쪽에서 우리의 대응 전략을 파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어머님! 제 기분이 어떻겠어요? 순간 이러다 이 사람들 Anna에게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무서웠어요. 지금 이 나라의 권력은 생각보다 훨씬 비상식적이거든요. 어쨌든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Anna 씨도 특히 신변안전에 신경을 쓰는 게 좋겠다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변호사님! 대한민국 서울의 치안 수준은 세계적인 수준이라 평가받는데 너무 지나친 걱정 아닐까요?
“어머님! 맞아요. 하지만 그들이 겉모습은 천사지만 뒷모습은 악마잖아요. 그걸 우리 Anna 씨도 몰랐던 거고요. 앞에서는 국민을 위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뒤에서는 악마라는 걸 알았으니 두 번은 당하지 말아야죠.”
“변호사님! 잘 알겠습니다.”
Susan은 마음이 무거웠다. 전반적인 상황이 비관적이다. Anna의 상황은 어려운 싸움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녀는 자신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쪽으로 상황이 전개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심 선고 공판은 언제죠?”
김재형 변호사가 앞에 놓인 변론 일정표 보면서 “2주 남았습니다.”하고 말했다.
“Anna야! 변호사님하고 별도로 잠깐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자리 좀 비켜 줄래” 
“알았어. 엄마!”
Anna가 변호사 집무실에서 나가자 Susan이 핸드백에서 준비했던 편지 봉투를 꺼내어 김재형 변호사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 좀 전직 대통령에게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전해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무슨 내용인지?”
“오늘 변호사님을 만난다고 해서 어제 밤늦게 편지를 하나 썼어요. 엄마로서 한번 뵙고 싶다는 내용입니다. 서로가 원만하게 합의해서 끝냈으면 좋겠다는 내용으로 짤막하게 썼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전해드리죠.”
김재형 변호사가 봉투 겉면에 존경하는 대통령님께 라는 글씨가 쓰인 서류 봉투를 챙겼다.
“변호사님!”
“예, 말씀하세요. 어머님!”
“딸에게 비밀로 해주세요. 잘 해결되면 좋겠지만 저도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엄마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노력해 봐야죠. 그쪽에서 거절하면 어쩔 수 없고요. 딸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한 건 제 딸아이 성격 때문입니다. Anna가 알게 되면 왜 자신과 상의도 하지 않고 왜 그러느냐고 화를 낼 겁니다.”
“잘 알겠습니다. 염려 마세요. 그쪽 변호인을 통해 전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시간 내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녜요. 어머니!”
“변호사님!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니! 좋은 얘기를 해드려야 하는 데 이거 어쩌죠.”
“아닙니다. 오히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Anna는 엄마가 처음 만나는 김 변호사와 무슨 얘기를 비밀스럽게 나누었는지 궁금했다. 두 사람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갈 때까지 아무 말하지 않았다. 다소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Anna는 엄마가 먼저 속 시원하게 얘기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엄마는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Anna가 시동을 걸었다. 승용차가 서초대로를 지날 때 그녀가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 
“엄마! 변호사님하고 무슨 얘기했어?”
“어~ 꼭 그걸 얘기해야 하니?”
“아니 궁금하잖아, 엄마가 나한테 숨길 얘기가 없을 텐데…”
Susan은 핑곗거리를 찾았다. 
“화 안 낸다고 약속하면, 말해 줄게.”
“알았어. 화 안 낼게.”
“나중에 변호사 비용정산 내가 할 테니 미리 전화 좀 해달라고 부탁했어.”
“엄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화 안 낸다고 했잖아.”
“아, 알았어. 엄마 그럴 거면 앞으로 나 혼자 변호사 만날 거야. 절대 그런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 약속해. 빨리 약속하라고.”
“그~ 그래 알았어. 알았다니까.”
  Susan은 딸에게 있는 그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것은 그녀만의 말 못 할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Susan은 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모녀는 호텔로 돌아오는 내내 말을 하지 않았다. Susan은 딸의 성격을 잘 아는지라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딸과의 냉랭한 분위기를 어떡하면 바꿀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은근히 딸이 삐진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Susan이 호텔 객실 문을 열었다. 뒤따라 들어온 Anna가 몸을 던져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Susan은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봄 코트를 벗어 옷장에 걸었다. 그녀가 Anna에게 커피 한잔하겠느냐고 묻자 Anna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Susan이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탁자 위에 놓인 서울시 내 관광 안내 설명서가 눈에 띄었다. 
“Anna야! 우리 제주도라도 다녀올까?”
Anna는 엄마가 왜 여행 얘기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 말하지 않으면 엄마가 속상해할 것 같아 대답했다.
“제주도?”
“그래, 봄이니까 지금이 한창 좋을 때잖아.”
“며칠이나?”
“2박 3일이면 되지 않니?”
“그 정도면 여유 있지.”
“그럼, 네가 한 번 일정을 짜 볼래? 비용은 엄마가 댈 테니까.”
“그거야 금방 할 수 있어.”
“그러면 내일이라도 갈까?” 
“알았어. 엄마!”
  Anna도 화낼 일이 아닌데 언성을 높인 게 미안했다. Anna는 엄마 마음을 알아차리고 노트북을 꺼내 여행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불과 한두 시간여 만에 비행기와 호텔은 물론 렌터카까지 예약을 마쳤다. 모녀의 제주도 여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제주도 첫날 이호 테우해변에서 본 일몰은 황홀했다. 일몰의 여운은 두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Anna는 엄마에게 시간이 되면 꽃지해변 일몰도 같이 가보자고 말했다. Susan이 이유를 묻자 Anna는 일몰 명소로 유명한 곳이라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Susan도 딸의 기분을 맞추려는 듯 그러자고 대답했다.
  저녁 무렵 동문시장을 찾았다. Anna가 인터넷에서 미리 검색해 둔 횟집을 찾아 들어갔다. 모녀는 둔 다금바리 회를 시켜 오랜만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술기운이 돌자 두 사람은 일상을 잊고 오랜 친구처럼 수다를 즐기며 밝은 웃음을 주고받았다. 여행은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이었다. 
  다음 날 모녀는 오전에 비자나무 숲을 걸었다. 머릿속에 엉클어진 번뇌를 일거에 날려 보내는 시간을 누렸다. 만장굴에 가서 태고의 신비를 느끼는 동안 영겁의 시간이 만든 자연현상에 감동했다. 성산일출봉과 우도를 거쳐 섭지코지에서 만난 파도 소리는 답답한 가슴을 씻기에 충분했다. 
  봄바람에 너울대는 유채꽃밭을 만났다. 꽃이 왜 피려 하는지 생존본능의 몸부림을 보았다. Anna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가냘픈 꽃들이 삶을 위해 비바람과 싸우는 의미를 되새겼다. 한라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도랑물이 큰 물줄기가 되어 떨어지는 폭포가 왜 아름다운 지도 생각해 보았다.
  물은 자신의 길을 만들며 흐른다. 흐름은 자연의 이치다. 이치를 따르지 않으면 생명은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세상은 자연과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아름답다. 세상도 마찬가지 이치가 아닌가 싶다. 삶은 공존의 가치를 공유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여행이다.
  여행은 치유의 시간이자 삶의 열정을 재충전하는 시간이다. Susan은 딸이 하루빨리 예전처럼 자신감을 찾길 원했다. 여행이 조금이나마 고통을 잊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여행이란 새로운 안목을 넓혀야만 진정한 여행이 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해 주는 것이 여행이다.

'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 > 장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을 죽인 달(9)  (0) 2023.07.09
별을 죽인 달(8)  (0) 2023.07.07
별을 죽인 달(6)  (0) 2023.07.03
별을 죽인 달(5)  (0) 2023.07.01
별을 죽인 달(4)  (0) 2023.06.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