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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장편소설

별을 죽인 달(8)

by 훈 작가 2023. 7. 7.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어색한 만남   

  Susan은 김재형 변호사에게 부탁한 편지가 잘 전달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마치 취준생이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듯 답장을 기다렸다. 아무리 세월이 지났어도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 석 자만 들어도 그는 분명 깜짝 놀라 만나자고 연락하고도 남을 인간이다.
  승소하기 어렵다는 것은 김 변호사를 통해서 재차 확인한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로 오기 전 동생 은영을 통해서 무모한 소송이라 전해 들었다. 동생은 소송에 대해 객관적인 상황을 언니에게 이메일을 통해 전하며 되도록 이른 시일 내 Anna를 설득해 미국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Susan은 서울에 온 후 줄곧 딸과 함께 보냈다. Susan은 어제저녁 식사를 하면서 오늘 하루는 쉬고 싶다고 딸에게 말했다. 나이가 있다 보니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시차 적응할 겨를 없이 강행군한 탓에 피로도 쌓였다. Anna는 엄마 뜻에 따라, 오랜만에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Susan은 딸과 같이 자다가 혼자 잠을 청하려니 허전했다. 하지만 피곤한 탓에 잠은 푹 잔 느낌이 들었다. 직업이 의사인지라 건강만큼은 철저하게 관리했다. 그러나 나이 탓인지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어느덧 육십 중반에 접어든 나이다. 인생은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아침 일찍 호텔 뷔페식당에 내려가 식사하고 올라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남산이나 산책해 볼까 하고 호텔을 나섰다.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니 조선시대 성곽처럼 돌로 쌓은 담장이 보였다. 오른쪽 오르막길로 올라갔다. 잔디밭이 보이면서 백범광장에 이르니 정면에 이시영 선생 동상과 김구 선생 동상이 서 있다. 
  여기저기 노숙자들이 눈에 띄었다. 눈에 거슬려 시선을 돌렸다. 산 정상에 남산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지난번 딸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일이 생각났다. 죽을 때까지 감추고 싶었던 상처인데 그게 왜 거기서 불쑥 튀어나왔는지 모른다. 
  젊은 날 그녀의 사랑은 미완성 교향곡으로 끝났다. 만약 결혼행진곡으로 이어졌다면 남산타워에 대한 사랑은 완성 교향곡으로 꽃을 피웠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슬픈 연가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Susan은 서울에 온 후 이상하게 잊었던 과거의 아픔이 자신도 모르게 그림자가 되어 뇌리에 어른거렸다.

  호텔로 돌아왔다. 답장이 올 때가 지났다. 여태껏 소식이 없다는 얘기는 만나지 않겠다는 뜻일까? 아니면 편지가 늦게 전달되어 만날 지를 결정하지 않은 것일까? 창가 쪽으로 가서 방금 다녀온 남산 쪽을 바라보다 답답한 마음에 뒤돌아서 탁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저 Anna 어머니, Susan입니다.”
“아! 예. 잘 지내셨어요?”
“예, 덕분에 잘 있습니다. 엊그제는 Anna와 같이 제주도도 다녀왔고요.”
“Anna를 위해 다녀오신 거군요.”
“Anna가 본래 모습을 빨리 찾았으면 해서요.”
“잘하셨어요. 어머니!”
“변호사님!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 편지 궁금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 그거요. 다음 날 그쪽 변호사 사무실에 직원을 보내 바로 전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예, 어머니! 또 뵐게요.”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여러 생각이 엉클어져 머릿속을 헤집고 날아다녔다. Anna 일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마음만 혼란스럽다. 그 순간 휴대전화 소리가 울렸다. 딸의 전화이려니 하고 받았는데 경직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설–은-명 여사님! 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전임 대통령님을 모시고 있는 민기용 비서관입니다. 각하 지시를 받고 전해드릴 게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지금 호텔 로비로 내려오셔서 받으셨으면 합니다.”
“아! 예,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Susan은 호텔 방을 나가기 전 거울을 잠깐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고 옷차림새를 다시 여민 후 객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무도 없다. 안에 있는 거울을 다시 보았다. 젊은 날 자존심을 지켜주던 꽃 같은 미모가 많이 지워진 얼굴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로비 쪽을 보니 훤칠하게 키가 크고 야무진 체격의 남자가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서 있다. Susan은 직감적으로 비서관일 거로 생각했다. 그가 먼저 Susan에게 다가오며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Susan도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설 여사님이시죠.”
“예, 그렇습니다.”
그가 대통령 휘장이 인쇄된 봉투를 내밀면서 말했다.
“각하께서 여사님 답변을 듣고 오라 하셨습니다. 보시고 ‘Yes’인지, ‘No’인지 답변해서 주시면 됩니다.”
“아, 그래요.”
Susan이 봉투를 조심스레 열었다. A4 지에 담긴 내용을 읽어보고 민기용 비서관에게 말했다. 
“편지 내용대로 하겠습니다.”
그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나서 호텔 문을 빠져나갔다. Susan이 호텔 로비 앞쪽으로 걸어가서 그가 타고 떠나는 승용차를 쳐다보았다. 검은색 벤츠가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점심 무렵 Anna가 호텔로 찾아왔다.
“엄마! 피로는 좀 풀렸어?”
“잠을 푹 자서 그런지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아.”
“엄마! 순댓국 좋아해? 나 순댓국 먹고 싶은데.”
“순댓국?”
“그래, 순댓국.”
“그런 것도 먹을 줄 아니?”
“처음엔 이런 걸 어떻게 먹지 했는데 먹어보니 맛있더라고.”
“이제 한국 사람이 되었네. 먹는 음식까지 적응된 거 보니까.”
“아니야, 엄마! 영양탕 같은 건 못 먹어.”
  호텔을 나오자 여기저기 빌딩에서 많은 직장인이 쏟아져 나왔다. 넥타이 차림의 남자들, 회사 근무복 차림의 아가씨들이 섞여 인도를 메웠다. 모녀도 인파에 섞여 걸었다. 내리막길 횡단보도를 건너 이면도로를 지나 남대문 시장으로 향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 골목으로 들어갔다. 오가는 사람들과 가끔 어깨를 부딪쳤다. 허름하게 보이는 먹자골목 안에 이르자 구수한 음식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골목 안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김이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자신들 가게로 들어오라며 목청을 높였다. 
  모녀가 나무로 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빨간 커버를 한 둥근 의자에 앉았다. Anna가 여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사장님! 순대 한 접시 하고요, 순댓국 하나 주세요.”라고 말하자 그녀가 씩씩하고 밝은 소리로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장님! 순대 말고 머리 고기를 더 주세요.”
“어머, 아가씨들은 머리 고기를 싫어하던데… ”
“저는 머리 고기를 더 좋아하거든요.”
“예, 알겠습니다.”
Susan은 Anna의 목소리에서 녀석이 제 모습을 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딸은 확실히 처음 만날 때보다 표정이 밝아졌다.
“엄마! 난 의외로 이런 분위기가 좋아. 뭔가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 같거든.”
“한국 사람이 다 되었네.”
“DNA는 한국산이잖아.”
“순대 나왔습니다. 근데 모녀지간 같은 데 한국 사람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예, 사장님! 무늬만 한국 사람이에요. 국적이 미국이거든요.”
순댓국집 여주인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어쩌다 미국 사람이 되셨어요?” 
“잘 모르지만, 운명일 거예요.”
Susan이 재빨리 말을 자르며 방향을 틀었다.
“맛있게 먹을게요. 사장님!”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미국서 오셨다니 더 드려야죠.”
“아녜요, 이것도 많아요.”
주방으로 가는 여주인을 보면서 Anna가 다시 말했다. 
“엄마! 오늘 저녁때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오늘은 저녁때 S대 병원에 근무하는 옛 대학 동창이나 한번 만나려고.”
Susan은 딸에게 에둘러 핑계를 댔다. 하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딸이 눈치채지 않게 태연하게 둘러댔다.
“그럼, 오늘 저녁은 운전기사 안 해도 되는 거야.” 
“그래, 너도 피곤할 테니 좀 쉬어.”
“엄마 말대로 그래야 하겠어.”

  늦은 밤. H 호텔 앞에 검은색 고급 외제 승용차가 서 있다.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던 건장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Susan을 맞으며 말했다.
“이 시간부터 호텔에 돌아오실 때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가 승용차 뒷문을 열자 Susan이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며 뒷좌석에 앉았다. 전직 대통령이 보낸 민기용 비서관이다. 그가 운전석으로 가 시동을 걸었다. 승용차가 남산을 휘감고 돌아 한남동 방향을 달리더니 금방 한강이 나타났다. 
  승차감이 좋았다. 비서관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그가 자신은 단지 여사님만 모셔 오고 모셔다 드리는 일만 수행할 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았다. 왜 밤늦은 시간에 만나야 하는지 의아했다. 첩보영화 주인공도 아닌데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이렇게 만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왼쪽으로 W 호텔 건물이 지나갔다. 오가는 차량이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칠흑 같은 밤이다. 문득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낯선 곳으로 자신을 납치해 Anna에게 협박을 가하려는 걸 아닐까? 아니다. 그건 지나친 상상이다. Susan은 어둠 속을 차 안에서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드나들었다.
  전직 대통령이 어떻게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 보았다. 그 인간의 성격상 절대 자신의 추행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노력을 기울여 봐야 한다. 원만하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도리가 없다. 그냥 자신이 생각한 대로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한강이 보이는 전망 좋은 언덕에 큰 저택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승용차가 대문 앞에 도착하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차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조명 빛에 잘 정리된 것 같은 정원수와 넓은 잔디밭이 한강 변 쪽으로 보였다. 별장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멋진 저택이다. 
  Susan은 대충 양평 일 그거로 생각했다. 대학 시절 양수리로 친구들과 놀러 온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알기로는 전임 대통령의 사저는 서울이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외부의 시선을 피하려고 장소를 이곳으로 택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기용 비서관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단아한 차림의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가 Susan에게 실례지만 절차라며 몸을 검색했다. 핸드백도 잠시 보여 달라며 살펴보았다. 검색이 끝나자 그녀가 방을 나갔다. 또 다른 비서관이 들어왔다. 그 남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인지 접견실인지 넓은 실내 공간이 나왔다. 앞쪽으로 건너편 한강 변에 어렴풋이 불빛에 보였다. 안내했던 남자가 여기서 기다리시면 곧 각하께서 나오실 거라며 말하고 나갔다. 그가 나가고 잠시 뒤 문이 열리더니 기억 속에 지워졌던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하, 정말 오랜만입니다. 설 여사님! 
“안녕하세요. 저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모는 변함없으시군요. 어쨌든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다니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옛날얘기를 하자고 연락을 드린 게 아닙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아무튼 이렇게 밤늦게 뵙자고 한 걸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기자들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기자들의 눈을 피하고 싶어서 이렇게 했으니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괜찮습니다.”
“앉으시죠?”
전직 대통령이 먼저 자리에 앉자. Susan도 자리에 앉았다.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손님인데…”
“감사합니다.”
전직 대통령이 인터폰을 들어 차 한 잔 가져오라고 말했다. 미리 준비되었던 모양인지 젊은 여성이 차를 들고 들어왔다.
“드시죠? 인삼차입니다.”
전직 대통령이 차를 권했다.
“Anna 양이 설 여사님의 따님이라 하기에 정말 놀랐습니다. 세상 좁다더니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이런 걸 보면 죄짓고 살면 안 되겠다고 하는 생각이 듭니다.”
Susan은 순간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너무 불쾌했다. 세월이 지났어도 그는 여전히 변한 게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화가 치미는 것을 억누르며 참았다.
“그나저나 따님을 참 훌륭하게 키우셨습니다. 저는 자식 놈 둘 있는 게 도대체 누굴 닮았는지 원, 아들놈은 고시에 몇 번 떨어져 내 체면 먹칠만 하더니 마누라가 후계자로 키우겠다면 처가 쪽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고, 딸내미 하나 있는 건 방송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재임 시절에 취직시켜 주었더니 적응 못 하고, 지금은 하고 싶은 거 한다며 파리에서 패션 디자이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전임 대통령은 애써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Susan은 언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전직 대통령은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친 표정이었다. 
  Susan은 그의 말이 역겨웠다. 표정과 말투 모두 위선적으로 보였다. 빨리 본론만 이야기하고 호텔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예의상이라도 몇 마디 하는 게 좋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바쁘실 텐데 저의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 인연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도 이렇게 만나 뵈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밤이 늦었으니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송은 하나마납니다. 따님을 설득해 소송을 취하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대통령님께서 우리 Anna에게 사과라도 한 말씀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사과합니까?”
“그건 공소장에 잘 나와 있지 않습니까?”
“증거가 있습니까? 소송이라는 게 객관적인 증거나 물증을 토대로 진실 여부를 판결하는 거 아닙니까?”
“대통령님은 인권변호사이셨습니다. 그뿐입니까? 독실한 천주교 신자 아닙니까? 이게 어디 법으로 잘잘못을 가릴 문제입니까? 대한민국 법이 도덕이나 윤리보다 위에 있습니까? 어찌 됐든 대통령님은 자식 같은 아이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다른 거 원하는 거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제 딸아이한테 사과 한마디만 해주세요. 그러면 돌아가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Anna가 미국에서 태어나 교육받다 보니 한국을 잘 몰라서 생긴 오해에 불과합니다. 아무 일도 아닌데 이를 성추행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저 격려 차원에서 안아 주고 토닥거려 준 것뿐인데 일을 너무 크게 키웠습니다. 내 명예를 실추시키고 법정으로 문제를 몰고 간 것에 대해 저는 심한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님에게 소중한 명예가 있다면 우리 Anna에게는 한 인간으로서 존엄한 인권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황 실장을 통해 섭섭하지 않을 금액으로 합의를 종용했는데 무슨 억하심정인지 거절하고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따님을 데리고 올 때도 파격적으로 수석 비서관급으로 대우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대통령님도 자식을 키우시지 않습니까? 우리 Anna가 대통령님의 딸이었다면 그리 하셨겠습니까? 그리 하지 않으셨죠. 대통령님은 나라의 최고의 어른이십니다. 제 딸아이는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고요. 대통령님께서 따뜻하게 한 말씀만 해주시 모든 게 끝납니다. 제발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고 팽팽한 긴장감이 거실 안을 짓눌렀다. 두 사람은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만 이어졌다. 시곗바늘을 과거로 돌리면 어렴풋이 낭만의 추억이라도 한 조각 떠오를 만한데 현실은 악연이 된 만남이다. 세상사 인연은 각본 없는 드라마처럼 삶을 만들어 간다. 
  전직 대통령이 인터폰을 들어 비서관을 불렀다. 민기용 비서관이 들어왔다.
“설 여사님 호텔까지 편안하게 잘 모셔다 드려.”
“예, 알겠습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전직 대통령이 자리를 일어서며 문을 열고 사라졌다. Susan이 말없이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다 일어서면서 비서관을 보았다. 그녀가 지친 듯 피곤한 모습으로 자리에 서며 말했다.
“비서관님!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예, 여사님! 저쪽입니다. 다녀오십시오.”

  어둠 속을 달리고 있다.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만나고 싶었던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Anna를 위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Susan은 호텔로 돌아오는 길 내내 허탈했다.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시도했던 어색한 만남은 그렇게 막이 내렸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니 잠이 오지 않았다. 냉장고를 열어 마시다 남은 와인을 찾았다. 커피포트 옆에 엎어놓은 와인잔을 가져왔다. 와인을 따라 단숨에 한 잔을 비웠다. 다시 와인을 따라 잔을 들고 창가 쪽으로 갔다. 
  어둠 속에 남산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슬픈 상처로 얼룩진 남산타워가 그녀의 심장을 촉촉하게 젖게 했다. 손에 든 와인잔을 마저 비우고 돌아서 의자에 앉았다. 심장이 뜨거워졌다. 왜 이리 그녀 자신이 초라해지는 걸까. 가슴 깊은 곳에서 잔잔한 아픔이 밀려왔다. 
  이슬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붉은 눈물이 와인잔에 떨어졌다. 왜 눈물이 나는 걸까. 눈물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스스로 악마라도 되어 복수의 칼이라도 빼 들고 싶었다. 하지만 권력의 뻔뻔함에 무력함을 보일 수밖에 없는 자신 때문이었다. 현실 속에서 이게 마지막 눈물이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주님이 있다고 마음을 추슬렀다. 몸을 바로 세우고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모으며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다. “주님! 가녀린 이 여자를 지켜주시옵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딸을 지킬 수 있도록 용기와 지혜를 베풀어 주시길 바라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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