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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장편소설

별을 죽인 달(9)

by 훈 작가 2023. 7. 9.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언쟁(言爭)

“Anna!, Anna!”
짙은 안갯속에서 헤매고 있다. 희미하게 Anna가 보였다. 손을 뻗어 딸을 잡으려 하는데 닿을 뜻 하면서 잡히지 않았다. 
“Anna! 제발 거기 서.”
녀석은 아무런 말이 서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딸을 향해 달려가도 제자리다. 딸의 이름을 절규하듯 불렀다. 두 팔을 벌려 소리쳤다. 
“Anna!, Anna!”
Susan은 맨발로 달렸다. 날개를 단 듯 Anna가 안갯속으로 날아간다. 그녀가 벼랑 끝에서 몸을 날렸다. Anna는 안 보이고 그녀의 몸만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흔들림이 느껴졌다. 몸이 젖은 빨래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엄마! 엄마!”
Anna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 차려, 엄마!”
희미하게 보이던 Anna의 얼굴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평소와 달리 머리가 무겁다. 꿈이었나 보다.
“Anna야! 어떻게 문을 열고 들어왔니? 
“무슨 소리야, 엄마가 Spare 키 주면서 혹시 부재중에 들어올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하나는 나보고 가지고 있으랬잖아.”
“그랬니? 그런데 아침 일찍 무슨 일이야.”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 않아 이상하다 싶어 달려왔지.” 
“그래.”
“휴대폰 확인해 봐, 내가 전화 얼마나 했는지.”
Susan이 왼손을 뻗어 침대 옆 탁자에 놓인 휴대폰을 집었다. 사실이었다.
“미안해, Anna야!”
“근데 엄마, 무슨 꿈을 꾸었어. 무어라고 막 소리치는 것 같던데.”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제저녁 분위기 좋았나 봐, 얼마나 아쉬웠으면 호텔로 돌아와 남은 와인마저  다 비웠어.” 
  Susan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은 채 Anna만 보았다. 녀석이 참 안쓰러워 보였다. 차라리 사내라면 그러려니 하겠건만 딸이다 보니 더욱 안 됐다 싶었다. 그나마 마음이 놓이건 제주도를 다녀온 후 전보다 표정이 밝아졌다는 점이다. 
  Anna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에게 웃으며 말을 던졌다. 
“엄마가 보기에도 엄마 딸 너무 예쁘지.”
Susan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우리 딸은 너무 예뻐.”
“엄마한테 그 소릴 듣고 싶었어.”
“엄마가 어제 좀 너무 달린 것 같아.”
Susan은 옛 친구들과 만나 회포를 푼 것처럼 연기하듯 말했다. 
“엄마! 기분 좋다 보면 그럴 수 있어.”
“그래, 네 말이 맞아, 기분 좋다 보면 술이 잘 받지.”
Susan은 Anna의 말에 장단을 맞췄다.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졌다. 이제 딸은 길고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 그녀는 속상한 마음을 감춘 채 딸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았다.
“몸은 괜찮아.”
“Anna야! 시원한 물 좀 갖다 줄래.”
Anna가 냉장고를 열어 생수 한 병을 꺼내 유리잔에 물을 따랐다. 
“엄마! 여기”
Susan이 물을 마셨다. 생수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Anna의 귀에 들렸다. 
“Anna야! 물맛이 왜 이렇게 좋은 거니?”
“엄마! 애주가가 다 된 거 같아.”
“내가 애주가이면 술 공장은 다 문 닫을걸.”
“그런가, 하하하”

  모녀가 점심 무렵 호텔 지하 1층에 있는 일식당으로 내려왔다. Anna가 카운터 매니저를 보자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예약했다고 말했다. 여종업원이 두 사람을 룸으로 안내했다. 아기자기한 일본 인형이 벽 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일식집 특유의 분위기다. Anna는 메뉴를 미리 생각해 놓은 듯 전복죽 하나랑 초밥 1인분을 시켰다. 여종업원이 나가자 Susan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Anna야! 앞으로 어떻게 할 거니?”
“나도 잘 모르겠어. 시작할 땐 내가 이길 확신 했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이건 내가 생각했던 현실이 아니야. 과연 이 나라에 정의가 살아 있는지, 민주주의가 살아있는지, 의문이 들어. 말로는 공정을 외치고 평등을 말하는데 이건 너무 달라. 이 나라가 뭔가 잘못된 거 같아.”
“이상과 현실은 다른 거야.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뀐다고 생각하니?”
“그래도 한국은 짧은 시간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했잖아.”
“경제적으로야 그렇게 볼 수 있지. 민주주의는 아니야. 성(性) 인식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고. 그간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가치관이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성(性)에 관한 한 남자에게는 관대했고 여자에게는 가혹할 만큼 엄하다고 엄마는 생각해.”
“그럼, 옛날부터 여자들은 인권을 무시당하며 살아왔던 거야.”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걸 운명처럼 여겼단 얘기지.”
“말도 안 돼.”
“세상이 그랬어. 한 마디로‘내로남불’이라고나 할까. 남자들은 아주 이기적이었지. 세상이 달라지긴 했지만, 여자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당당하게 나설 필요가 있어.” 
“그럼, 아직도 당당하게 나서지 못한다는 얘기네.” 
“엊그제 김 변호사님이 한 말이 다 맞아. 여성들은 이를 알면서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거지. 법으로 이겨봤자 가해자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지만, 여자들은 신상만 털리는 꼴이 되는 거야. 평생 주홍 글씨처럼 상처를 안고 사는 게 너무 무서우니까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지.” 
  이때 노크를 하는 소리와 함께 음식이 나왔다. 식사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모녀는 점심을 먹으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난 엄마로서 너의 결정을 존중해, 지금까지 응원해 왔던 것처럼. 그런데 한편으로 너의 미래를 생각해 보면 이 소송을 위해 온갖 열정을 쏟는 걸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어. 차라리 너의 꿈을 위해 힘을 쏟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 
“엄마 말이 맞긴 해. 그렇다고 악마와 타협할 수는 없잖아. 누군가는 그와 맞서야 한다고 생각해.”
“엄마도 네 의견에 동의해. 그런데 엄마는 누군가가 네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건 너무 이기적이잖아.”
“아니, 누군가가 네가 아니고 대한민국의 누군가 이었으면 좋겠어. 너는 미국인이지 한국인이 아니야, 이 문제는 대한민국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엄마는 생각해. 안 그러니?”
“그럼, 엄마는 이 싸움을 포기하라는 거야” 
“엄마는 네가 이긴다 해도 한국 사회는 쉽게 바뀌지 않을 거라는 얘기를 하는 거야. 그래서 너의 미래를 생각해 보라는 뜻이야. 이 문제는 한국 여성들에 맡기라는 뜻이야.”
“나도 엄연히 한국인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잖아.”
“하지만, 널 키워준 건 미국이잖아.”
“엄마! 우리 그만하자. 밥맛 없겠어.”
분위기가 냉랭해지자 Anna가 말꼬리를 돌렸다.
“엄마 마음은 잘 알아, 그리고 네가 엄마를 힘들게 해서 미안하고.”
“Anna야! 알다시피 이 싸움이 너의 신념과 의지에 관계없이 승소 가능성 없잖아. 이후 스스로 감당해야 할 상처와 후유증을 생각하면 어떤 선택이 너 자신의 인생을 위해 현명한 것인지 깊이 고민해야 하지 않니?” 
“물론 엄마 말대로 미래가 중요하지. 그러나 미래가 그냥 온다고 꿈이 현실이 되는 거 아니잖아?”
“Anna야! 과거에 집착하고 머무르다 보면 미래의 행복을 위해 앞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어.”
“알았어, 엄마! 무슨 말하는지 충분히 이해한다고.”
  두 사람의 생각은 팽팽히 맞섰다. Susan은 엄마로서 속상했다. 녀석이 너무 이상에 치우쳐 현실을 너무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빨리 상황을 판단하여 자신과 타협을 해야 하는데 딸은 타협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엄마로서 그런 딸이 너무 답답해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Anna는 바로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엄마랑 같이 있다가는 다시 말다툼할 것 같아 피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혼자 생각해 보았다. 왜 언쟁을 벌이면 물러서지 못하는 것일까? 엄마 말도 틀린 말이 아닌데 굳이 자기 뜻을 굽히지 못하는 것일까?
  Anna는 엄마가 자신을 이해해 주시길 원했다. 그런데 반대로 설득하려 한다. 누구보다 엄마는 자신을 잘 안다. 그런 엄마가 왜 자신을 설득하려 했는지 마냥 싫었다. 스스로 자신이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다. 엄마는 현실을 냉정하게 보고 자신은 잘못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탓이다.
  저녁 무렵 전화를 걸었다. 점심때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고 말했다. 엄마는 아니라고 말했다. 엄마는 설득하려고 한 것에 대해 오히려 미안하다고 했다. 전화를 끊었다. 엄마가 자신 때문에 고생을 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하루빨리 이 일이 끝내고 미국에 돌아가 엄마를 편안하게 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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