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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행복, 그대와 춤을

To Have or to Be?

by 훈 작가 2023. 2. 28.

 
추억은 과거의 기억이다. 그 속에서 행복했었던 장면을 찾아보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를까?  내 경우는 내 집을 마련했을 때이다. 1998년 7월 드디어 나도 내 소유의 아파트를 가지게 되었다.  마흔한 살 때다. 등기부 등본에 내 이름 세 글자가 새겨진 서류를 손에 쥐고서 내 소유의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내 생애 처음 행복이란 단어를 만났었다. 그 순간 먼 과거 속에 얼룩진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주인집 눈치를 보며 셋방살이 생활을 했던 그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 집 없는 서러움을 벗어나 꿈을 이루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나도 모르게 눈이 뜨거워졌었다. 그날 밤 조용히 동네 슈퍼마켓으로 가서 소주 한 병과 마른오징어 한 마리를 사 왔다. 달콤한 소주가 내 가슴을 타고 내려가면서 아팠던 상처를 어루만지며 심장을 달랬다. 차갑던 심장이 뜨거워지면서 온몸에 온기가 돌았다. 그 덕분에 썰렁하고 살림살이 하나 없는 아파트 거실에서 신문지 몇 장을 깔고 이불도 없이 잠을 잔 기억이 바로 엊그제 같다.     
    
인간은 소유의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벌거벗은 알몸으로 태어날 때 우리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나온다. 무언가를 잡아야 하는 인간의 반사적 본능이다. 그 순간부터 인간은 소유의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삶을 이어간다. 내 것을 만들어야 성취감을 느끼고 내 욕구가 충족되어야 행복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곧 소유가 행복으로 직결된다고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갓난아기가 본능적으로 손에 잡으려고 하는 것도 결국 행복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행복을 손에 쥐려고 이 세상에 나온 거나 다름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논리적으로 비약이라 할 수 있지만 삶과 행복을 논리적으로 접근하다 보면 인생은 삭막해진다. 적어도 삶의 이야기는 감성적인 마인드로 접근해야만 로맨틱하고 드라마틱한 요소가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소유를 추구한다.  어떤 사물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비용을 지불하고 구매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구매행위의 목적은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의․식․주(衣食住)부터 자신의 욕망이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다양한 물건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그 가운데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 갖고 싶은 것을 비용을 지불하고 구매하거나 소비를 한 것들도 많다. 적은 비용으로 식도락(食道樂)을 즐기는 행복도 있을 수 있고, 자기만족을 위한 행복을 위해 큰돈을 들여서 큰 마음먹고 사는 명품브랜드 상품도 있을 수 있다. 때로는 사치스러운 욕망을 채우기 위해 고가(高價)의 보석도 살 수 있다. 모두가 소유를 통한 행복을 얻기 위한 행동들이다. 이와 같이 소유와 행복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소유를 통한 행복은 물질에 국한되지 않는다. 권력을 손에 쥐려고 진흙탕 속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행복도 있을 수 있고, 명예와 출세를 통한 행복을 얻기 위해 불철주야 피와 땀을 흘리며 노력하는 소유의 행복도 있다. 세상사 소유라는 단어를 빼놓고서 행복을 말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소유 자체가 행복의 목적이라면 행복은 거기까지다. 소유의 목적이 되었던 것을 갖게 되면 그 순간 행복은 이루어진 셈이다. 행복에 대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소유하려는 행위가 완료되는 순간부터 행복도 마무리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행복의 만족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줄어든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변하고 하루가 다르게 식어간다. 이런 이유로 소유의 행복은 마음속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행복을 손아귀에 넣은 순간부터 이미 내 곁을 빨리 도망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만, 행복이 머무르는 시간적 차이는 있다. 행복이란 감정이 가슴속에 머무르는 것은 짧은 것은 순간일 수 도 있고, 하루 일 수도 있고, 몇 날 며칠 일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 더 오래가는 것도 있을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어느 순간 나 자신도 모르게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소유라는 행복의 완성은 결국 뇌리에서 소멸되어 망각의 늪으로 묻혀버린다. 

내 집을 갖는 것이 삶의 목표였었고, 그 자체가 유일한 행복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삶의 추억을 떠올리는 이유가 있다. 내 소유의 집을 마련했을 때 행복이 항상 내 곁에 있을 줄 알았다. 세월이 내 인생을 조금씩 갉아 먹으면서 어느 날 내 곁에 있던 소유의 행복이 어디론가 가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유가 나에게 전해 준 행복은 파랑새처럼 날아왔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먼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허무한 깨달음이다. 결국 내가 행복이라고 믿는 실체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존재다. 어떤 경우는 바람처럼 스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더 심한 경우는 아예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보니 그때가 정말 행복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바로 그런 경우다. ‘소유’라는 단어 속에 숨어 있는 행복은 존재하지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그런 행복은 추억이란 기억장치에 오래 남아 있지 않는 것 같다.
 


인간은 체험(experience)의 본능을 추구하는 존재다. 그 과정을 몸소 즐기고, 욕망을 채우는 만족스런 행동이 행복이라 느끼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체험은 간접적일 수 있고, 직접적일 수 있다. 독서, 음악 감상, 영화나 연극 관람 등을 통한 체험은 간접적이지만, 등산, 래프팅, 산악자전거, 스키 등 다양한 스포츠 활동이나 여행  등은 직접적인 체험이다. 체험(experience)을 통한 행복은 인간이 지닌 오감(五感)을 통해 자극을 받고 느끼며 얻는다. 체험을 통해 현장 속에서 직접 느끼는 행복은 온몸으로 기억을 한다. 단순한 뇌세포를 흥분시키며 얻어지는 쾌감이 아니다. 뇌세포에 잠들어 있는 과거의 같은 기억이라도 체험의 자극이 다르다. 추억이라는 단어 속에 묻혀있는 여러 가지 기억 중에서 소유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었던 행복과 체험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었던 행복을 클릭해서 화면을 열어 서로 비교해 보면 행복의 감도가 어떻게 다른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같은 행복이라도 체험(experience)이라는 단어가 만든 행복이 더 기억에 오래 남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추억으로 기억된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렇다. 

‘체험‘ 이란 단어에서 행복을 만드는 것은 수없이 많다. 그 중 하나가. ‘여행’이란 보통명사다. 여행이란 단어만 놓고 보면 ‘소유’ 개념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디까지나 사물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행은 몸소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만날 수 있는 단어다. 따라서 ‘소유’와 ‘체험’ 사이에서 보면 여행은 당연히 체험으로 분류된다. 행복으로 가는 길목에서 ‘소유’를 선택하든 ‘체험’을 선택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몫이다. 내 경우는 언제부터인가 ‘여행’이란 체험이 주는 행복이 내 삶의 만족을 크게 지배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갖는 ‘소유의 행복’ 보다는 어떤 ‘존재의 행복’이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존재의 행복’은 내가 어떤 시간 상태에서 행복을 느끼느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유의 순간이 주는 행복이 있고, 어떤 상태로 존재하고 있느냐의 행복이 있다. ‘행복’이란 말을 ‘소유와 존재’ 관점에서 이해할 때 어떤 시간의 개념이 더 내 마음을 지배하는지를 깨달았기에 이젠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은 소유의 시간보다 존재의 시간을 통해 더 큰 행복을 얻는다는 사실을 나는 확신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being)로 시간을 경험(∼ing)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시간의 궤적 위에  존재하고 있을 때 행복한 감정이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내 경우, 여행을 다녀와 기행문을 쓸 때가 행복하다. 시간의 궤적을 더듬어 문장을 만들고, 그 안에 사진을 붙이면서 느끼는 과정이 또 다른 여행이 된다. 여행이란 시간 위에 내가 존재하고 있을 때,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낀다. 내가 여행자로 존재할 때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하다는 뜻이다. 넓은 의미에서 인생도 여행이니 매 순간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도 행복하게 생각해야 한다. 여행은 깨달음의 즐거움 얻고,  자신을 성숙한 존재로 거듭나게 해주는 행복이 있다. 
   
독일계 미국인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이 저술한 그의 명저 <소유나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유에는 행복이 없다. 행복은 존재에 있다.”
“행복은 [나] 라는 존재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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