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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장편소설

별을 죽인 달(31)

by 훈 작가 2023. 9. 15.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신념과 현실

   Susan은 허탈했다. 실낱같은 희망이 무너졌다.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야만 될 시간이 온 것 같아 두렵고 무섭다. 피했으면 좋겠는데 그럴수록 고통이 깊어진다. 이제 막다른 골목인가? 운명은 자신이 고통의 늪을 직접 건너가도록 몰아가고 있다.
  지난번 H 호텔 식사 때 남편이 말한 남산타워가 떠올랐다. 차라리 오늘 저녁 남편에게 판도라의 진실을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 진실을 말해야 할 시점인지도 모른다. Susan은 승부수를 던져야겠다는 결심을 굳혀갔다. Susan이 크게 숨을 쉰 후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 저예요.”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했어.”
“오늘 저녁 당신하고 모처럼 외식이나 했으면 하는데?”      
“외식이라고. Anna는?”
“김 변호사와 저녁 약속 있데요.”
“오 그래. 그럼, 시간 맞춰 일찍 대사관저로 가지 뭐.”
Susan이 전화를 끊고 Anna에게 갔다. 방을 노크하고 들어서자 Anna는 노트북으로 실시간 뉴스를 검색하고 있었다. 특검법(안) 부결 뉴스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녁 약속은 몇 시에 있니?
“5시 30분까지 서초동 사무실로 간다고 했어.”
“엄마는 아빠랑 모처럼 외식하기로 했는데.”
“잘됐네. 모처럼 두 분이 데이트도 하시고.”
“아빠는 네가 빠져 섭섭한 모양이던데.”
“아니야, 오히려 잘 된 거야. 그러지 말고, 아빠 서울야경이나 구경시켜 드려. 아빠도 남산타워 가시면 좋아하실 거야.”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고.”
“그럼, 남산타워야?”
“아빠는 아직 모르지.”
“내가 예약해 줄까?”
“어머, 얘 좀 봐, 너 관심법(觀心法)이라도 배웠니? 그 얘기하러 온 건데.”
“하하하 그랬어. 시간은 몇 시로 해줘.”
“저녁 7시 30분.”
“아빠도 랍 스타 좋아하시잖아. 그걸로 예약할까?”
“와인도 가능하면 부탁할게.”
“「샤토 몬텔레나」로 하면 되지?”
“아빠는 다른 거 안 마셔.”
Anna가 스마트 폰으로 전화를 걸더니 바로 예약을 끝냈다. 
“엄마! 나 먼저 나갈 거니까 맛있게 드시고 와.”
  교대역은 2호선과 3호선이 교차하는 환승역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Anna는 밀려가는 인파에 묻혀 전철역을 빠져나왔다. 햇빛이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만약 출퇴근 시간대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서울이 교통지옥이란 말이 실감 났다.
  빈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니란 생각에 꽃을 살까 잠시 망설이다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집게를 들어 튀김소보로, 크로와상, 후렌치 파이, 슈크림 빵, 애플파이 등을 골고루 담은 후 마지막으로 건포도가 들어있는 롤 케이크를 추가해 계산을 부탁한 후 카드로 결제했다. 

 “안녕하세요.”
Anna가 사무실 문을 열면서 인사를 건넸다. 
“Anna 씨! 정말 오랜만이에요. 몸은 어떠세요?”
 박 사무장과 직원들이 일어나 Anna를 반겼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다 나았어요. 빈손으로 오기가 뭐 해서 요 앞에서 빵 좀 사가지고 왔어요.”
Anna가 빵이 들어 있는 쇼핑백을 박 사무장에게 주며 말했다. 
“그냥 오셔도 되는데. 아무튼 잘 먹겠습니다.”
박 사무장이 쇼핑백을 받아 책상에 놓고 변호사 집무실로 들어갔다. 김재형 변호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왔다.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Anna 씨! 건강한 모습으로 이렇게 다시 봐서 정말 반가워요.” 
김 변호사가 Anna 손을 잡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간 고생 많았어요. 얼마 만에 퇴원한 거죠?”
“한 달 20일 정도 되었어요.”
“생각보다 오래 병원에 있었네.…”
“잘 모르지만, 의사 선생님이 천운이라 하시더라고요.” 
“어쨌든 퇴원하니까, 어떠세요.”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공기가 너무 그리웠어요. 그리고 이렇게 숨 쉬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도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여직원이 인삼차 두 잔을 가지고 들와 탁자에 놓고 나갔다. 두 사람이 차를 마시며 말을 이어 갔다.
“특검법(안) 뉴스는 들으셨죠?”
“사실, 기대를 많이 했는데…” 
“Anna 씨도 실망이 크셨군요.”
“이번에 다르겠지 생각했어요.”
“국회의원이 아니라 거수기 역할 하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어요. 당에서 결정하면 일사불란하게 따르는 게 우리 국회거든요.”
“저도 미국에서 건너와 5년간 지켜봤지만, 국민을 위한 국회인지 모르겠어요.”
“우리 국회는 자신들의 정략적 이해가 우선시 되는 쪽으로 표결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게 현실이죠. 미완성 의회민주주의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변호사님! 제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 이상과 현실이 왜 이리 멀게 느껴지죠?”
김 변호사가 인삼차 한 모금을 마셨다. 
“한국과 미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많은 차이가 있어요. 미국은 유럽 봉건주의 핍박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와 민주주의를 정착시켰죠. 반면에 한국은 미국 교과서에 실린 걸 그대로 가져왔고요. Anna 씨는 미국이라는 민주주의 시스템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성숙한 민주사회에서 생활하다 좀 덜 성숙한 민주사회로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괴리감을 느끼는 거라고 봐요.”
“그럼, 제가 한국에서 바보 같이 지낸 거네요.”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한국 민주주의의 허상과 실상을 직접 체감하고 있는 거라고 받아들이면 그만이죠.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직접 겪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Anna가 머리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다가 탁자 위 놓인 인삼차 한 모금을 마셨다. 잠시 스스로를 생각해 보다 다시 말했다.
“변호사님! 제가 돈키호테처럼 거인과 철없이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Anna 씨가 그렇게 스스로를 책망하면 제가 Anna 씨를 잘못 본 거예요. Anna 씨는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졌어요. 그런 면에서 Anna 씨는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죠. 저는 Anna 씨의 순수성과 용기에 빠져든 거예요. Anna 씨의 행동이 무모해 보였지만 저는 그것을 신념으로 판단했어요. 남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가치와 양심이죠.
“그건 변호사님이 저를 좋게 봐주셔서 그런 거 아닌가요?”
“없지 않아 그런 면도 있겠죠. 하지만, Anna 씨는 옳지 않은 일에 타협하지 않는 신념과 포기하지 않는 승부 근성 같은 게 있어요. 그걸 보면서 저는 그동안 살면서 세상과 많이 타협하며 작은 신념을 포기하며 산 게 아닌가 반성했어요. 용기도 없었고요. 참 부끄러웠어요, 저 자신에게….”
“저를 통해 변호사임이 터닝 포인트를 찾으셨다는 말씀이세요?”
“맞아요. Anna 씨 사건을 다루면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기회로 삼은 거죠. 실망과 희망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거든요. 어느 쪽을 보느냐는 자신의 선택이죠. 제가 Anna 씨에게 말하고 싶은 건 Anna 씨 사건이 한국 사회의 여성 인권 문제에 불을 붙였어요. 변화가 일기 시작한 거예요. 세상을 바꾸는 데는 진통이 따르죠. 그것을 겪고 나면 우리 사회도 여성 인권에 대해 한층 더 성숙해지는 질 겁니다. 저는 확신해요. 그런 면에서 Anna 씨는 자부심을 느껴야 해요. 아셨죠?”
“변호사님!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다시 용기가 생기네요.”
  김재형 변호사는 Anna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는 애썼다. Anna는 김 변호사를 통해 몰랐던 한국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예기치 않게 길어졌다. 그러다 문득 김 변호사는 저녁 약속이 생각났다.
“아참 그렇지. Anna 씨 퇴원하면 멋지게 한 번 쏜다고 했지. Anna 씨! 뭘 먹고 싶으세요.”
“변호사님! 오늘은 제가 모실게요.”
“아니에요. Anna 씨 퇴원하면 꼭 저녁 한 끼 사주고 싶었어요. 자. 차 마시고 천천히 나갈까요.”       
  두 사람은 인근 한정식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변호사는 식사하면서 2심 공판 재개 여부에 대해 Anna의 의견을 물었다. 이에 대해 Anna는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김재형 변호사는 Anna에게 특검 법안이 부결된 것에 대해 실망하지 말자고 말하며 심기일전하는 자세로 힘내자고 다짐했다. 
 
  전철 안은 다소 한산했다. Anna는 빈자리가 보이는데도 앉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승객들 대부분이 고개를 숙인 채 자고 있었다. 몇몇 젊은 사람들만 스마트 폰 삼매경 빠져있었다. 가끔 잡상인이 들어와 유창한 말솜씨로 상품설명을 늘어놓은 후 몇 개를 팔고는 다음 칸으로 사라졌다. 미국에서는 볼 수 없던 진풍경이다.
  Anna가 오피스텔 문을 열었다. 스위치를 켰다. 형광등 불빛이 들어왔다. 방 안에 있던 세간살이 물건들이 일제히 일어나 주인을 반겼다. 어디 갔다. 이제야 돌아왔냐는 표정들이다.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뉴스 전문 채널 앵커가 특유의 목소리로 하루 동안 일어난 뉴스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현 정부의 실세로 알려진 장관의 아들 병역면제와 관련된 의혹을 수사하던 검찰이 결과를 발표한 모양이다. 화면 밑에 수사 결과 무혐의 결론이라는 자막이 눈에 들어왔다.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 생각이 났다. 그들은 네가 꼬리를 친 게 아니냐는 식으로 빗대어 말하곤 했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뚫어져라 담당 경찰을 바라보았다. 그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정말 기분이 나빴다. 결국 그들은 고소장에 주요 피의사실을 누락시킨 사실을 재판과정에서 알았다.
  Anna가 한국 민주주의에 처음 불신을 갖게 된 시점이다. 헌법에 명시된 정의를 구현해야 할 경찰이 공정과 정의 그리고 평등의 가치를 외면한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애당초부터 자신의 조국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잘못 알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꿈에 그리던 내 안의 조국이 나를 실망시켰다. 언젠가 고국의 품에서 살아야겠다는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그녀의 희망찬 미래의 꿈을 짓밟아 버렸다.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면서 그녀를 슬프게 만들었다.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가?
  Anna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청년들을 떠올렸다. 과연 그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어쩌면 그들은 자신보다 더 큰 좌절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청년들이 엄마찬스, 아빠찬스에 분노하는지 이제 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지도층 인사들이 죄를 짓고 위법한 행동을 하지 않다고 목청을 높였고, 도덕적 가치를 짓밟고도 반성하지 않으며 서민들의 영혼에 상처를 주었다. 부모찬스를 이용해 공정의 가치를 무너뜨린 현실을 지켜본 청년들은 상실감에 분노할 수밖에 없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누가 희망을 줄 것인가? 어쩌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된 걸까?
  냉장고를 열어 반 정도 남은 와인을 꺼냈다. 와인을 잔에 부어 한 모금 마셨다. 세상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상을 안다는 의미는 삶에서 무엇을 깨달았다는 뜻일까? 한국에서 세상을 안다는 것은 어쩌면 현실 속의 모순을 어쩔 수 없이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Anna는 그게 너무 싫었다.
  안다는 것은 몰랐던 사실을 경험하는 것이다. 세상은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 분노한다. 모두가 결과가 정의로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상처받는다. 이게 세상을 안다는 의미라면 Anna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을 안다는 뜻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Anna는 괴로웠다.
  Anna는 자신이 무엇 때문의 서울에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보통 사람들은 하루하루 자신의 존재를 지키려고 일에 매달려 산다. 일상은 먹고사는 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런데 자신은 먹고사는 일에 매달리고 있지 않다. 이게 Anna 자신의 미래를 위해 옳은 선택인지 의문이 들었다. 다른 때 보다 오늘 하루가 괴롭다. 
  Anna는 소송에만 매달려 있다. 돈벌이와는 무관하다. 작금의 싸움이 그녀의 삶을 갉아먹고 있다. 그녀는 삶을 무의미하게 소모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아버지까지 자신의 일에 나선 상황이다. 꿈을 위해 열정을 쏟아야 하는데 꿈과 먼일에 몰두하고 있다.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이 든다.       
  창밖을 보았다. 거리에 늘어선 빌딩 숲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서울의 밤을 수놓고 있었다. 앞쪽에 대우빌딩이 보였고 그 뒤로 조명을 받은 남산타워가 밤하늘을 외롭게 지키고 있다. 순간 엄마와 아빠가 서울야경을 보며 로맨틱한 식사를 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Anna가 책상 위에 있던 휴대폰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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