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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장편소설

별을 죽인 달(33)

by 훈 작가 2023. 9. 21.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자매(姉妹)

“오늘 시간 있니?”
“언니가 부르면 언제든 총알 같이 갈 수 있어.”
“Anna 문제만 매달리다 보니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거 같아.”
“내가 언니라도 그랬을 거야.”
“이해해 주니 고맙다. 은영아!”
“언니! 그나저나 Anna 문제는 왜 자꾸만 더 꼬여만 가는 거야.” 
“그러게, 말이다.”
“언니! 그냥 가만히 있을 거야.” 
“그래서 오늘 좀 만났으면 하는데….”
“어디서 볼까?”
“점심이라도 같이 먹게 명동 어때?
“그럼, R 호텔 커피숍으로 12시까지 갈게.”
“차 갖고 올 거니?”
“아니, 명동은 너무 복잡해서 전철 타고 가려고.”
“그래, 호텔서 보자.”
“언니! 좀 늦는다고 뭐라고 하지 마.” 

  예전 같았으면 지나가다 친구라도 우연히 만나 수다를 떨었을 거리다. 세월은 그녀를 바꾸어 놓았다. 그때는‘설은명’이었지만 지금은 ‘Susan Edward’다. 그녀가 오늘만큼은 다시‘설은명’으로 돌아왔다. 
  ‘설은명’이라는 이름은 스스로 버린 이름이다. 하지만 정체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이름이다. 적어도 은영과 유전자를 공유한 만큼 ‘설은명’이란 이름은 자매란 명사 속에 살아있다.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회귀본능처럼 과거를 더듬으며 그녀는 명동을 걸었다. R 호텔이 보였다. 세월이 지났어도 그 자리다. 로비에 들어섰다. 투숙객이 일본 사람인 듯 일본말이 프런트데스크 쪽에서 들려왔다.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창가 쪽에는 빈자리가 없다. 홀 중앙 쪽 자리에 막 앉는 순간 뒤에서‘언니!’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은영의 목소리였다. 생각보다 빨리 온 동생은 언제나 밝은 얼굴이다. 
“어쩐 일이니? 이렇게 일찍 오게.”
“언니 보고 싶어 빨리 왔지.”
“뭐 마실래?”
“난 커피는 마시고 왔으니까 그냥 시원한 주스 마실래. 언니는?”
“그럼, 같은 거 시켜.”
동생 은영이 먼저 음료를 주문했다.
“언니! 우리 둘이 이게 얼마만 인 줄 알아?”
“난 기억도 안 나.”
“하긴 강산이 변해도 세 번은 변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은영아! 넌 어떻게 나이를 먹어서 늙지를 않니?”
“언니! 사돈 남 말 하듯 하지 마. 언니도 머리만 좀 희끗희끗해서 그렇지 팽팽해.” 
이때 여종업원이 주문한 음료를 가져왔다. 두 사람이 빨대를 이용해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언니! 불렀으면 용건을 얘기해야지.”
“어이구, 눈치는 빨라서. 그나저나 뭐가 그리 급해.”
“그래, 알았어. 언니!”
“은영아!”
“왜? 언니!”
“여기서 수다나 좀 떨다가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뭐 사 줄 건데?”
“나 산다는 얘기 안 했다.”
“언니는 의사고 나는 백수야, 당연히 언니가 사야지.”
“얘! 미국에서는 ‘당연히’란 말 없어.”
“당연하지, 미국이니까. 여긴 한국이고.”
“너한테 밥 얻어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소원이라고?”
“예나 지금이나 깍쟁이 내 기질을 당할 재간이 없다는 얘기야.”
“하하하 오랜만에 수다 떠니까 재밌네. 언니! 난 어렸을 때 콤플렉스가 많았어.” 
“뭐, 네 성격에 콤플렉스 있었다고? 말도 안 돼.”
“언니는 항상 완벽했잖아, 공부면 공부, 미모면 미모,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어, 아! 딱 하나 있다. 연애, 그거 빼놓고 모두 완벽했잖아. 그래서 엄마가 날 보고 항상 언니 좀 보고 배우라며 야단쳤지. 그땐 왜 그리 언니가 미웠는지 몰라.”
“그랬니? 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당연히 모르지. 항상 난 깔깔대고 웃으며 다녔으니까.”
“옛날 생각하면 너한테 죄지은 게 많아서 난 할 말이 없어. 어머니 모시며 너 혼자 가장 노릇 하느라 힘들게 했지. 그러다 보니 나 때문에 결혼도 늦게 하고…” 
“언니!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어쨌든 언니 덕에 재산은 내가 다 물려받아 궁색하게 살지 않았어. 다만, 언니한테 받은 충격 때문에 결혼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내가 스스로 늦게 한 건데 뭘 그래.”
“그렇게 얘기해 주니 고맙긴 한데. 그래도 난 언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죄가 늘 그림자처럼 평생 따라다니잖아.”
“언니! 그건 운명이야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하지만 언니한테 불만이 있다면 딱 하나 있어.”
“그게 뭔데?”
“날 너무 외롭게 만든 거.”
“…” 
“아이고 내가 또 우리 언니 아픈 데를 건드렸나 보군 그래?” 
“아니야, 은영아! 모두 다 사실이잖아.”
“언니 또 우울해지네. 안 되겠다 딴 얘기해야지.”
“다른 얘기?” 
“언니는 다른 건 모두 백 점인데, 연애만큼은 완전 빵점이었어. 안 그래 언니?”
“맞아, 그래서 한국을 떠나 미국에 살잖아.”
“언니! 내가 약 올린 거 기억나.” 
“뭔데?”
“언니는 남자를 도둑놈이 아닌 도둑님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라고 했잖아. 난 모든 남자는 늑대 근성이 있으니 넘어가면 안 된다고 마르고 닳도록 언니한테 떠들어댔지. 한데 언니는 너무 교과서적인 순정파라 네 얘기가 말 먹힐 리가 없었던 거라고. 언니 그래 안 그래.”
“맞아, 네 얘기가. 대학도 문과에 가고 싶었는데, 대학 나와서 밥 굶을 일 있냐며 엄마 등쌀에 의대에 가야 했지. 나 생각보다 무조건 엄마 말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런 면에서는 내가 너보다 현명하지 못했던 것 같아.”
“언니가 현명하지 못했던 게 아니지. 단지, 언니가 가고 싶은 방향이 아니었던 것뿐이지.
“그래도 난 네가 남자 잘 만난 잘 사는 거 보면 신기해, 공부 생각하면 지금 네가 제부 만난 게 이해가 안 되거든.”
“언니! 연애도 실력이야. 애들 아빠가 나 놓칠까 봐 얼마나 안절부절못하였는지 알아. 하하하. 그렇다고 내가 공부를 못한 건 아니잖아.” 
“맞아.”
“언니! 난 오늘처럼 날마다 언니랑 이렇게 지내고 싶어. 너무 좋아.”
“나도 그래. 하지만 어떡하니 내 운명이 이런 걸. 네가 이해해 줘야지.” 
“어쨌든 Anna일 잘 마무리되면 동생인 내 생각 좀 해줘. 나 좀 외롭지 않게 말이야. 알았지.” 
“그래, 생각해 볼게.”
“Anna는 좀 어때?”
“몸은 괜찮은 거 같은데 전에 비해 얼굴이 어두워진 것 같아.”
“사고로 인한 후유증 아냐? 우울증 같은 거 말이야.”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국회에서 추진된 특검(안)에 크게 기대했던 모양이야.”
“그럴 만도 했겠네. Anna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을 텐데.” 
“사실, 내가 더 기대했어.”
“특검 부결로 나라가 더 시끄러워진 거 같아. 언론도 그렇고, 여성단체나 대학가도 그렇고. 광화문에 여대생들이 주도하는 촛불시위도 그렇잖아.” 
“나도 모르겠다. 어쩌다 Anna 문제가 이렇게 됐는지.”
“그나저나 몸은 이상 없어?”
“의사가 그랬잖아, 천운이라고.”
“그날 언니 전화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정말 하늘이 까맣더라고.”
“그래도 네가 있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르겠더라.”
“언니 그러니까 피는 물보다 진한 거야.”
“그런가 봐 은영아!
“언니! 그만하고 점심 먹으며 얘기하자. 나 배고파.”
“그래, 은영아!”
“언니! 멀리 갈 필요 없이 19층 뷔페로 가자.”
  두 사람은 자매이지만 다르다. 은명은 동생이 어릴 적 콤플렉스가 있었다는 말에 미안했다. 그저 말 잘 듣고 공부만 잘하던 모범생이었다. 다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나갔던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미스터리였다. 
  은영도 그 얘기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언니의 성격을 잘 아는지라 묻지 않았다. 은영은 언니가 모든 게 완벽한 것 같아 질투가 났다. 그나마 자신은 언니만큼 수재는 아니었어도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다. 같은 자매로서 언니는 모범생 중의 모범생이었고 자신은 명랑 소녀 같은 기질에 낙천적인 성격으로 대조적이었다.
“언니! 날 부른 이유를 말해야 하잖아.”
은영이 초밥 하나를 입으로 가져가며 말하자 은명이 서류 봉투를 하나 꺼냈다. 
“이거 뭐야?”
“열어 볼 필요 없어. 그냥 제부에게 말하면 다 알아서 해 줄 거야. 분석 결과 나오면 이메일로 보내줘.”
“언니! 혹시 그거 맞지?”
“맞아.”
“그럼, 진실을 공개할 각오를 한 거야?
“은영아! 사실 서울에 올 때부터 어쩌면 이 방법밖에 없겠다고 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 그런데 Anna 생각하면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더라고, 고민 끝에 네 형부에게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할 것 같아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형부도 오래전에 알고 있었더라고.”
“아니, 어떻게?”
“결혼 전 내가 다니던 성당 신부님한테 모든 사실을 얘기했는데, 신부님을 통해 알고 있었나 봐.”
“그럼, 20년 넘게 형부와 같이 살면서 내색하지 않았다는 얘기네.”
“그렇지.”
“와! 형부 대단하시네. 언니! 형부한테 잘해야겠다.” 
“그래야지. 어쨌든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었는지…” 
“언니! 용기를 내야 해. 언니 행복을 지키려면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처음 은영이 네 전화받고 설마 했어. 그런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 있잖아, 지금도 믿기지 않아, 믿고 싶지 않은데 눈 떠보면 현실이야.” 
“언니가 정말 마음고생 많았겠다.”
“고통은 나 혼자로 족한데, 문제는 우리 Anna야.”
“Anna는 언니와는 달라, 언니처럼 내성적인 아이가 아니잖아. 내가 볼 땐 충분히 이겨 낼 그거로 생각해. 언니! Anna를 믿어.”
“네 말이 맞긴 해. 그래도 엄마로서 걱정되는 걸 어쩌겠니.”
“언니! 어차피 건너야 할 강이야. 단단히 마음먹고 흔들리지 마.” 
“그래도 네가 옆에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진심이야, 은영아!
“언니! 핏줄이라고는 언니와 나. 단둘이야. 정말 언니가 고맙다고 생각하면 이겨야 해. 힘내! 알았지? 언니!”
“그래, 알았어. 네 말 대로 힘낼게.”
“이건, 애 아빠한테 전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
“다른 건 없고 꼭 비밀만 지켜달라고 전해줘” 
“그건 걱정하지 마.” 
“고맙다, 은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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