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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장편소설

별을 죽인 달(40)

by 훈 작가 2023. 10. 5.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몰락(沒落)

 

    충격은 외부에서 영혼의 내부로 전달되는 심장의 반응이다. 전직 대통령의 영혼이 벼락을 맞은 듯 흔들렸다. 심장이 용광로처럼 펄펄 끓어올랐다. Anna가 내 핏줄이라니?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인간적 굴욕감이 얼굴을 덮었다. 권력에 취해 지내던 자존심 영역에 수치심이 빛의 속도로 들이닥쳤다.

    바로 어제까지 큰소리치며 반전을 시도했던 그였다. 하지만, 판도라 상자가 열리는 순간 그는 패닉(panic) 상태에(panic) 빠졌다. 당당하게 나서서 친자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에 나설 수가 없었다. 지금껏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권력과 금력을 동원해 안간힘을 다 쓰며 버텼지만, 더 이상 이 고비를 넘길 재간이 없어 보였다.

    TV를 끄고 거실 장식장 안에 있는 30년 산 위스키를 꺼내 잔에 따라 단숨에 마셔버렸다. 특유의 위스키 향이 입안을 덮었다. 빈 잔에 다시 양주를 부었다. 술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생애 처음 부딪히는 위기감이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어쩌다 내가 이 지경이 된 거지

    한순간에 벼랑 끝으로 몰린 상황이 되었다. 추락하는 권력자의 고독이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 날개를 잃고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봉황이 된 처지에 놓이다 보니 앞이 캄캄했다. 세상을 헛살았나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들고 있던 술잔을 다시 목구멍으로 넘겼다. 뜨거운 알코올이 영혼을 엄습해 왔다.

   험한 정치역정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승부와 맞섰다. 정치판에서 그에게 패배란 단어가 없었다. 그런데 왜, 이 순간 밀려드는 패배감이 무섭게 밀려들며 두려움을 몰고 오는 것일까? 반전의 승부수가 없을까? 이대로 무너져야 하는 걸까? 패자의 어두운 그림자가 쓸쓸하게 나약해지는 자신의 심장을 한없이 짓눌렀다.

   천하를 호령했던 기개는 어디로 간 것일까? 한때는 세상을 쥐고 흔든 그가 아니었던가. 지금껏 남부러운 것 없는 삶을 살아온 그였다. 자신의 인생행로에 오로지 영광과 환희와 함께 승자의 역사만 쓰며 살아온 인생이다.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파도가 자신을 휩쓸고 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Anna가 자신의 피를 받은 딸이라는 ‘설은명’의 기자회견이 믿기지 않는다. 어찌할 것인가. 한평생 자신만 보고 살았던 아내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아내는 물심양면 자신을 청와대로 보내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준 적이 없었다.

   유학 간 딸 혜린이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녀석에게 아빠로서 어떻게 얼굴을 들 수 있을 것인가? 그간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아들 녀석에게는 어떤 낯으로 대할 것인가? 가장으로서 가족들과 함께 다정하게 시간을 보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정말 무심한 남편이었고 이기적인 아버지였다.

   충격이 뇌파를 진동시키면서 눈앞이 막막했다. 벗어나고 싶은데, 어떻게든 가정을 지켜야 하는데눈앞에 어른거리는 가족들 얼굴이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그의 인생도 하산 길로 접어든 나이다. 그런데 홀연 막다른 벼랑 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났다. 여기가 인생의 끝이어야 하는가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술기운이 돌면서 흑백 영상이 펼쳐졌다. 한때 심장이 뜨겁던 청춘 시절이 있었다. 젊음은 자신감이 넘쳤고, 야망은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꿈이었다. 자신감 넘치던 시절 사랑은 불장난 같은 추억이었다. 그 시절 큐피드 화살을 맞은 것처럼 자신을 눈멀게 한 여인이 나타났다.

   심장에 불을 지폈던 여인이 설은명이었다. 가슴에 품었던 가장 이상적인 여인이었다. 빼어난 미모, 명석한 두뇌, 한국 최고의 명문 의대 출신 젊은 의사,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여자였다. 가슴을 뛰게 했던 그녀는 한 사내를 사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랑은 한순간에 한 남자의 영혼을 빼앗아 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녀의 매력은 자신을 사랑에 눈멀게 했다. 정치적 야망을 불태우고 있을 때 행운이 찾아왔다. 의원 보좌관 시절 한 파티에서 우연히 소개받았다. 그녀에게 영부인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설은명에게 구애했다. 그의 패기 넘치는 마초적인 매력에 여인은 흔들리고 말았다.

   사랑도 승부라고 여겼던 야망에 찬 젊은 보좌관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남산타워에서 환상적인 서울야경을 배경으로 청혼 작전을 펼쳤다. 여인은 로맨틱한 분위기에 젖었다. 그리고 황홀한 분위기에 취해 그가 던진 청혼이란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꽃을 꺾기 위한 하나의 유혹이었다.

   ‘설은명은 환상에 빠져들어 늑대의 본성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 순진했다. 여인은 결국 남자들의 형이상학적 본성을 백마 탄 기사로 착각했다. 야망에 가득 찬 젊은 정치 지망생은 여인을 청혼이란 유혹의 늪에 빠져들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유혹의 덫에 걸려든 여인은 한순간의 황홀함에 순정을 바쳤다.

   늑대는 사랑의 이름으로 꽃을 꺾었다. 늑대는 자신이 꺾은 꽃을 보고 울부짖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쟁취했노라고! 늑대의 사랑은 거기까지였다. 꽃을 꺾은 늑대는 마음이 변해 돌아섰다. 동상이몽의 남녀심리는 눈물을 만들었다. 늑대는 하울링 외치며 돌아섰고 또 다른 꽃을 찾아 떠났다. 그녀는 실연에 빠졌다.

   ‘설은명은 늑대의 본성을 모른 채 첫사랑의 비극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늑대는 이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여인은 비련의 주인공이 된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사랑이 만든 인연을 쾌락으로 치부한 사내는 바람이 되었다. 여인은 피눈물을 흘리며 어린 딸과 조국을 떠났다.

 

   전임 대통령은 자신이 만든 업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잊혀진 계절에 불나방 같은 사랑을 기억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젊은 날 한때 사랑이란 두 글자로 스쳤던 불장난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그는 한 여인의 순수한 사랑을 짓밟은 후 외면하며 지금껏 권력을 누렸다.

   이제 와 보니 무책임한 인간이었다. 그가 한 여인에게 질곡의 삶을 걷도록 한 사랑의 불장난이 인과응보로 돌아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유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자업자득인 셈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냉정하게 지난날 설은명과의 인연을 기억하며 과거를 돌이켜보니 그런 결론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그게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가 평생을 통해 추구하고 이루어 놓은 권력의 성()이다. 철옹성 같았던 그 성()이 지금 무너지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막고 싶은데 묘수가 없다. 그는 아직도 권력이란 아편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전임 대통령의 영혼을 파죽지세로 점령한 위스키 향이 그를 무력화시켰다. 그는 스스로 무의식의 세계로 도피해 자신을 감추었다. 충격을 받은 그의 영혼은 끝내 술에 의지해 캄캄한 숲 속 길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상황을 살피던 최지철 실장이 조용히 들어와 담요로 덮어주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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