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장편소설

별을 죽인 달(43)

by 훈 작가 2023. 10. 9.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이별 전야

  Anna는 서울 생활을 정리했다. 가장 서두른 일은 오피스텔 처분이었다. 시세보다 싸게 내놓자, 매수를 원하는 이들이 아우성치듯 몰렸다. 사람들이 부동산에 대해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실감했다. Anna 희망자 중에 지방에서 온 젊은 여성 직장인에게 매도했다.
  김재형 변호사와 이별이 남았다. 만날 때는 몰랐는데 이별하려니 왠지 떠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별 뒤 마음에 불어닥칠 눈물을 어떻게 감당할지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만날 때부터 이별은 예고되어 있었다. Susan이 Anna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한마디 던졌다.
“변호사님하고 헤어지려니까 자신이 없지?”
“맞아. 엄마!”
“그게 세상이야.”
“이별이 뜨거울수록 인연이 아름다웠다고 받아들이면 돼.”
“그럼, 이별은 어떻게 해야 해.” 
“마음에 있는 걸 있는 그대로 표현해.”
“막상 이별의 순간이 닥치면 눈물부터 날 것 같아.”
“그땐, 울어야지. 그걸 참으려고 애쓰면 오히려 이별이 더 아픈 거야.”
“더 아픈 이별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솔직하란 얘기네.”
“그렇지.”
“알았어. 엄마! 그건 그렇고. 성금은 얼마나 하고 떠나는 게 좋을까?”
“무슨 성금?”
“전에 기부하고 싶다고 한 거?” 
“아, 그랬지. 엄마도 내 마음에 좀 보탤까?” 
“엄마도? 
“조국에 대한 애정은 별로 없지만,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는 뜻에서 도움을 주고 떠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사실, 엄마도 피해의식이 남아 있거든. 네가 OK 하면 10만 달러 정도 할게.”
“그렇게나 많이.”
“돈만 벌어 가지고 있으면 뭘 하니? 좋은 일에 써야지.”
“엄마 돈 많은가 보네?”
“지금껏 모으기만 했지 쓸 시간이 없잖니?”
“엄마도 이젠 병원 정리하고 남은 삶은 좀 즐기면서 살아.” 
“그래 알았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바로 그래야겠어.”
성금은 Anna가 오래전 생각했던 일이다. 그러나 교통사고를 겪으면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조국에 대한 애정이 한순간 사라졌다. 심장은 분노의 피가 끓어올랐다. 그런 이유로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려 했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났다. 
   Anna가 마지막 인사차 김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Anna 씨! 웬 선물?”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고맙게 받을게요. 자, 배고픈데 점심 먹으며 얘기합시다.”
“그럴까요.” 
“Anna 씨! 냉면 어때요?”
“좋아요.”
  두 사람이 사무실을 나섰다. 식당은 김 변호사 단골 냉면 집이었다. 냉면집이 멀지 않았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 손님을 한바탕 치른 후였다. 김 변호사는 평소 좋아하는 물냉면을, Anna는 비빔냉면을 주문했다.
“사실 오늘만큼은 멋진 곳으로 모시고 싶었는데…”
“마음만 받을게요.”
“변호사님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Anna 씨! 이제 날 보러 안 올 것처럼 말하네, 그럼, 정말 섭섭한데…”
“자주 안부 전하겠습니다.” 
“Anna 씨가 이제 돌아간다니까 마음이 짠해지네요.”
“변호사님!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해요. 처음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따뜻한 감정에 빠져드는 게 사람의 본성인가 봐요.”
“Anna 씨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이제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네요.”
“모두 변호사님 덕분이죠.”
“냉면 나왔습니다.” 식당 종업원이 냉면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김 변호사가 다른 냉면집에 비해 육수 맛이 깔끔하고 면이 쫄깃하고 찰지다며 단골집이 된 이유를 짧게 말했다. 
  두 사람은 사무실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갔다. Anna가 이별을 위한 마지막 얘기를 꺼냈다.
“변호사님! 꼭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무슨 말인데 그래요.”
“변호사님 덕분에 제가 분에 넘치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받은 사랑을 다 갚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 생각이 들어 저와 같은 피해자들을 위해 용기를 내라는 뜻에서 성금을 기부하고 떠나고 싶어요. 이런 뜻을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훌륭한 생각이라며 보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총 20만 달러를 마련했는데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어요.”
  김재형 변호사는 아무 말 없이 Anna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을 텐데 Anna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성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 자신의 상처를 지우려 하는 것 같다. 김 변호사는 가슴이 뜨거워져 멈칫거렸다.
“Anna 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자고 나면 짜증 나는 뉴스만 차고 넘치는 세상인데… 내가 Anna 씨를 제대로 본 것 같네요. Anna 씨! 정말 멋진 여자예요. 그런데 왜 이 얘기를 이 자리에서 저에게 하는지 알아요. 언론 앞에 나서기 싫은 거죠? 언론이 앞장서서 Anna 씨를 꽃뱀으로 만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죠.”
“예, 맞아요. 변호사님!”
“그 마음 알아요. 하지만, Anna 씨가 아셔야 할 게 있어요.”
Anna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김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
“어쨌든 Anna 씨 사건이 세간의 이슈가 되기까지는 언론의 역할이 컸던 건 인정해야 할 거예요. 언론이 아니었다면 수많은 사람이 Anna 씨를 응원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겠죠? 저는 Anna 씨가 서울을 떠나기 전에 최소한 그간의 받았던 사랑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고 떠나는 게 Anna 씨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꼭 언론에 나서야 하나요?”
“그 간의 열정, 그 용기 다 어디로 간 거예요? 자 힘내시고요. 우리 헤어지기 전에 이별을 아름답게 마무리했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 문제는 변호사님께 맡길게요.”
“내가 알아서 준비할게요. 우리는 같은 동지잖아요. 안 그래요?”
두 사람이 밝은 표정으로 웃었다.

  Anna가 김 변호사를 만날 무렵 Susan은 운영을 만났다. 자매는 아버지를 모신 대전 봉안당을 다녀오며 실버타운에 들러 어머니를 만났다. 실버타운을 출발할 즈음 은영이 저녁 먹고 올라가자며 인근 도로변의 한 가든 식당에 들어갔다. 
“언니! 언제 미국으로 돌아가?”
“Anna 변호사 일만 마무리되면 바로 떠나야지.”
“형부는?”
“형부는 그간 미뤄놨던 출장 일정을 조정하느라 여념이 없지.”
그사이 주문한 한정식이 나왔다. 식탁에 놓인 반찬 수를 보며 은명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밥은 검은 돌솥에 담겨 나왔다.
“은영아! 이거 임금님 수라상 같다. 얘!”
“그럼, 언니. 중전마마 기분으로 먹으면 돼.”
“하하하. 중전마마.”
“중전마마 먼저 드시지요.”
“그럼, 네가 상궁이니?”
“어차피 언니가 계산할 거잖아. 그러니 상궁이라도 해야지.” 
은명이 수저를 들었다. 그녀가 김치찌개 맛을 보더니 옛날 어머니가 끓여 주셨던 그 맛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언니! 나 정말 언니한테 놀란 게 있어.”
“놀라다니 뭐가?”
“나. 언니 기자회견 다 봤거든.”
“근데?”
“언니 하나도 떨지 않고 정말 말 잘하던데. 참 우리 언니 대단하다 생각했지.”
“왜 안 떨려. 좀 덜했던 것뿐이지. Anna가 준 우황청심환이 효과가 있었나 봐.”
“언니! 매스컴도 타고 이젠 유명 인사가 다 됐어.”
“얘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마.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뭘 조마조마 해.”
“기자들이 예전에 미스코리아 선에 입상하지 않았냐고 물을까 봐.”
“언니 그랬구나. 하기야 언니 성격에 그럴 만도 했겠네.”
“그 질문이 안 나와서 정말 다행이지 뭐니.”
“언니가 의사가 안 되었으면 유명 스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만약 내가 언니였다면 난 의사 때려치우고 스타가 되었을 거야. 어쨌거나 난 우리 엄마, 아버지한테 불만이야. 분명히 실수한 거라고. 언니랑 나랑 얼굴을 바꾸어 태어났어야 하는데.”
“하하하” 
은명과 은영이 큰 소리로 웃었다.
“언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궁금한 거?”
“이건 정말 궁금해서 그래, 언니!
“뭔데?”
“머리카락 Sample 어떻게 구한 거야?”
“아, 그거.”
“내가 아무리 잔머리의 고수라도 미스터리거든.”
“얘 너도 알다시피, 그 사람 말이야. 절대 잘못을 인정할 인간이 아니잖니?”
“그건 그렇지.”
“김 변호사를 통해 편지를 보냈어. 비밀리에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어느 날 비서관을 통해 호텔로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비서가 보낸 차로 심야 시간에 양평 별장으로 갔지. Anna에게 사과 한 말씀만 해 주시면 딸과 함께 돌아가겠다고 얘길 꺼냈는데 결과야 뻔하잖아. 예상하고 내 나름대로 준비했지. 그가 얘기를 끝내고 나가자, 비서관이 들어오길래, 화장실 좀 이용하고 싶다고 말하고 거실 화장실에 들어가 미리 준비한 지퍼 팩에 수건에 묻어 있는 거랑 샤워부스 배수구에 묻어 있는 머리카락을 담은 거야.”
“아! 수수께끼가 풀렸네.”
“모근이 없으면 DNA 분석이 불가능한 건 상식적이잖아. 그래서 Sample을 되도록 많이 채취했지. 단 한 번의 기회인데 실수하면 그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갈 증거 확보가 여의치가 않잖아.”
“언니! 이런 점이 나하고 완전히 달라, 난 덜렁덜렁하는데 언니는 치밀하거든.”
그 말이 끝나자, 은 명이 핸드백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은영에게 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은영아! 이거 받아.”
“언니! 이게 뭔데.” 
은영이 봉투를 받으며 열어 보았다.
“언니! 나 이거 못 받아.” 
“은영아! 언니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받아. 무늬만 내가 언니지, 항상 너에게 죄짓고 사는 기분이야.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고 네가 욕해도 난 할 말 없어. 이미 미국으로 도망갈 때 이미 각오했으니까. 은영아! 대신 앞으로 자주 올게.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못 한 효도를 조금이라도 해야 하잖아.”
“언니! 그래도 이건 너무 큰돈이야.”
“그간 네가 나 없는 동안 혼자 고생한 거에 비하면 이것도 적어. 그러니 그냥 받아 둬. 아무런 부담 갖지 말고.”
“언니! 그래도 되는 거야.”
“네가 맘 편히 받아주는 게 나한테는 편해. 그리 알고 넣어 둬.” 
“나 완전 로또 맞은 기분이네. 어쨌든 언니! 잘 쓸게. 그리고 언니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후회 없이 살아. 어차피 인생은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게 되어 있어. 누가 덜 후회하느냐가 문제지.”
“나도 이번에 미국에 돌아가면 바로 병원은 정리할 생각이야. 이제 나도 황혼이잖아. 남은 인생은 해 보고 싶었던 글도 써 보고, 사진도 배우고 여행도 다니고 싶어. 문학소녀의 꿈을 지금부터라도 도전해 보고 싶어.”
“언니! 잘 생각했어. 언니도 나이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어. 그나저나 아주 한국에 들어올 생각은 없어?
“아니, 오래전에 결정했어. 형부를 만나면서 국적을 포기했잖아. 그때부터 난 이미 한국인이 아니야.”
“어쨌거나 난 언니만 행복하면 돼. 그것뿐이야.”
“그래, 고마워.”

'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 > 장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을 죽인 달(45)  (8) 2023.10.11
별을 죽인 달(44)  (2) 2023.10.10
별을 죽인 달(42)  (2) 2023.10.07
별을 죽인 달(41)  (2) 2023.10.06
별을 죽인 달(40)  (2) 2023.10.0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