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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여행이다/서유럽

베르사유 궁전

by 훈 작가 2023. 10. 21.

‘질투(嫉妬)’라는 말은 시샘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 남자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여자가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 소유와 욕망의 관점에서는 다른 사람이 가진 무엇을 못 마땅히 여기며 탐을 내거나 싫어하여 마음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질투는 본능에 가깝다. 

 

질투(嫉妬)는 남· 여 간의 애정 문제나 인간이 지닌 소유와 욕망은 인간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드라마나 사극을 보면 질투는 여성들의 전유물로 많이 묘사되곤 한다. 남자는 여러 명의 첩을 두었고, 본부인과 첩들은 한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갈등을 그리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역사 속에서 질투를 그린 드라마 중 대표적인 예가 장희빈이 아닐까, 싶다. 숙종은 자주 중전의 자리를 갈아치우는 우유부단 모습을 보이며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에 벌이진 질투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원인의 제공자다.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무당까지 동원했다. 결말은 당쟁에 휘말리면서 살육까지 불러온다. 

 

질투는 여자들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이순신과 원균이 그 예다. 이순신이 수군통제사로 자기 상관이 임명되자 원균의 질투심은 극에 달한다. 이순신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온갖 모략을 동원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의 모략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다. 결국 원균은 대세를 그르치고 전쟁터에서 죽고 만다. 

서유럽 여행길에서 새삼스럽게 ‘질투’라는 단어를 만났다. 바로 베르사유 궁전 투어 때 현지 가이드가 꺼낸 말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권력자의 질투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이 설명은 의외였다. 이 궁전이 질투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역사의 주인공은 루이 14세다. 문제의 발단은 보르비콩트 성에서 시작된다. 보르비콩트 성은 자기 신하이자 왕정 재무장관인 니콜라 푸케(Nicolas Fouquet)가  자신의 거처로 지은 성이다. 그는 부친에게 물려받은 재산과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명성과 재력을 과시할 만한 성을 건설하여 비극을 자초하고 만다.

 

푸케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 르 보(Louis Le Vau)와 화가 르 브랑(Charles Le Brun)과 조경가 르 노트르(André Le Nôtre)에게 부탁하여 최고로 화려한 궁전을 짓는다. 막상 성을 짓고 보니  푸케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아름답고 멋진 17세기 최고의 프랑스 성이 만들어진 것이다.

 

보르비콩트 성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 루이 14세는 푸케의 초대로 성을 방문하게 된다. 약 460만 평 규모의 1,000개가 넘는 분수와 옥외 극장, 금실로 짠 태피스트리와 촛대, 훌륭한 벽화로 이루어진 성의 내부에 루이 14세는 감탄하게 된다. 그의 방문을 기념한 화려한 불꽃놀이, 아름다운 음악, 성대한 연회까지 대단했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푸케에 대해 자존심이 상하고 질투를 느끼기 시작했다. 보르비콩트 성에 비해 자신의 왕실은 너무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부터 푸케가 국가의 재정을 낭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이를 구실로 삼아 푸케를 감옥에 넣고 종신형을 선고받고 1680년 감옥에서 죽는다. 

 

루이 14세는 보르비콩트(Vaux-le-Vicomte) 성을 짓는 데 참여했던 건축가와 예술가들을 불러 베르사유 궁전을 지으라고 지시한다. 원래 습지였던 곳을 바꾸어 숲을 조성하고 강줄기를 바꾸어 분수를 만들었다. 궁전의 상판에서 천장의 못 하나까지 모두 장식할 정도로 화려하게 궁전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지었다.

 

화려함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베르사유 궁전은 절대 왕권의 상징이자 ‘루이 14세’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50년 동안 총력을 기울인 대궁전이다. 1682년 ‘루이 14세’가 왕궁을 국민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갖기 위하여, 현재 ‘루브르 박물관‘으로 이용되는 ‘루브르 궁전’에서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긴다. 

 

1682년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왕궁이 옮겨 온 이래 매일 수백 명의 귀족들이 모여 화려한 연회를 열었다. 이것은 루이 14세에게 언제 반기를 들지 모르는 귀족들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나약하게 만들려는 전략이었지만, 결과적으로 1789년 프랑스혁명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역사는 아이러니한 반전이 있다. 반전의 출발은 질투(嫉妬)다. 베르사유 궁전은 권력자의 질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건축은 물론 예술적 가치가 훌륭한 유적임이 틀림없다. 그 이면에 숨어 있던 진실은 반전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이 질투의 산물이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이 궁전은 1682년 완공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파리 튀일리 궁전으로 옮길 때까지 사용했다. 베르사유 궁전은 왕만 거주한 게 아니다. 귀족은 물론 외국에서 온 사절까지 포함해 무려 5,000여 명이 살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큰 도시 규모 궁전에 화장실이 없었다는 점이다. 

 

궁전을 지을 때 화장실이 혐오스럽고 더러운 곳으로 여긴 나머지 신성한 궁전에 이를 만들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했을까? 궁전에 사는 왕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은 개인용 변기를 사용했고, 볼일을 보고 밖으로 던졌다. 그래서 궁전 밖은 온통 오물로 더럽혀져 냄새가 진동했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처치 곤란한 상태였다고 한다.

 

개인용 변기가 없는 사람은 할 수 없이 건물 밖으로 나가서 볼일을 봤다. 이때 굽이 낮은 신발은 용변이 묻어 곤란해지자 개발된 것이 하이힐(high heel)이다. 또 몸에 불쾌한 냄새를 없애려고 개발된 것이 여성들이 사용하는 향수란다. 그래서 지금도 프랑스는 향수의 최고 브랜드로 알아준다고 한다.

궁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화장실이 없어서 궁전 주변 숲 속에서 용변을 처리하였다. 관리인은 ‘입장 금지’라 쓴 팻말을 곳곳에 설치했는데 그때 쓴 글씨가 ‘에티켓’이다. 당시 ‘에티켓’ 이란 말은 ‘입장 금지’란 뜻이었다. 그 말이 지금은 ‘예절’이란 뜻으로 바뀌어 쓰고 있다. 결론은 ‘에티켓’이란 말도 베르사유 궁전에서 유래가 말이다. 

 

마지막으로 가이드가 한 마디 덧붙인 사실은 모자였다. 베르사유 궁전 건물 2층이나 3층에서 배설물을 창밖으로 던져 봉변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날벼락을 피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 챙이 넓고 긴 모자라고 한다.

 

베르사유 궁전 투어는 단지 몇 시간으로 모든 것을 구경하고 알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눈으로 구경하는 것만도 하루가 부족하다. 하지만 현지 가이드를 통해 알게 된 궁전의 역사적 진실과 상식만으로도 투어는 만족스럽다. 역사의 현장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여행의 진정한 즐거움을 깨닫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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