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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감성 한 잔

추워야 피는 꽃

by 훈 작가 2023. 11. 23.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면 가을은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낙엽이 지기 시작하면 종착역을 앞두고 달립니다. 따스하던 바람도 서늘해지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집니다. 계절의 시계는 변함없이 돌아가고, 아름답던 꽃들의 외출을 더 이상 보기 어려워집니다. 짧은 계절이 아쉽습니다. 공허함이 짙은 그리움으로 가슴에 남는 시간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절기상으로 입동도 지났고, 첫눈까지 내렸으니까요.

가을은 떠나는 계절입니다. 꽃들이 떠났고, 낙엽도 떠나고 있습니다. 따스했던 바람도 떠났습니다. 그 자리를 밀치고 들어온 찬바람이 갈 곳을 잃고 보도 위에 뒹구는 낙엽을 몰고 갑니다. 꽃에 머물고, 단풍에 깃들었던 그리움도 이젠 갈 곳이 없어졌습니다. 어딜 봐도 꽃에 이끌렸던 사랑을 느낄만한 대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선이 가는 곳마다 가을 정취를 느낄 만한 곳이 지워지고 있는 겁니다.


한때 꽃은 태양의 연인이었고, 둘의 뜨거운 사랑은 늘 그래왔듯이 결실로 이어져 왔습니다. 태양의 따뜻한 온기만이 사랑의 꽃을 피우게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꽃으로 피지도 존재하지도 못하는 겁니다. 가을은 사랑이 결실과 함께 완성되는 계절입니다. 달리 보면 사랑의 종말이자, 생의 마감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가을이 쓸쓸하고 그리움에 사무치는 계절일지도 모릅니다.

겨울로 가는 길목입니다. 찬 바람이 불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도 꽃이 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사랑만이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역설적으로 차가운 사랑도 꽃을 피우게 합니다. 다만, 피었다가 빨리 지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겁니다. 이 꽃이 빨리 지는 이유는 따뜻한 햇살 때문입니다. 늦가을 이른 아침에 잠깐 피었다 지는 이 꽃의 이름은 서리꽃입니다.


서리꽃을 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꽃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리’를 떠올리면 우선 쌀쌀한 추위가 느껴져 몸도 마음도 움츠리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언어영역에 들어오면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대표적인 표현이 ‘된서리 맞다’입니다. 그밖에 나이 들어 흰머리가 늘면 이를 빗 대어 서리가 내렸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런 꽃을 카메라에 담으러 왔습니다. 영하 3도, 동트기 전, 출사지에 도착했습니다. 새벽 4시 40분에 아파트주차장을 출발해 1시간 30분을 달려왔습니다. 먼저 온 승용차도 2대나 보입니다. 옅은 어둠 속에 내 옆에 주차한 차에서 내린 사람들, 4명이 오붓하게 라면 끓여 먹는 냄새가 끝내줍니다. 어쩔 수 없이 군침만 삼킵니다. 후각은 참을 수 없는 유혹에 곤욕을 치릅니다.


하나둘 삼각대를 들고 완전하게 무장한 카메라맨들, 꽃을 만나러 모여듭니다. 탄성을 자아내며 반기는 이도 있습니다. 손이 시려 추운 날씨에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꽃을 만나는 즐거움은 누구도 감추지 않았습니다. 설레는 마음도 잠시, 아침 해가 꽃을 지우기 전에 너나 할 것 없이 꽃을 모셔 옵니다. 어떡하면 아름답게 꽃을 모셔올까 지극정성을 다합니다.
 
순백의 꽃으로 갈아입은 숲의 나무와 가을 잎이 아름답습니다. 환한 미소로 당신을 안아봅니다. '그래, 이 맛이야.' 이럴 때 황홀하다고 하면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눈치 볼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에 가장 맛보기 싫은 맛이 죽을 맛이라면, 이 순간은 사는 맛이 느껴집니다. 꽃보기가 어려운 계절입니다. 그래도 꽃은 핍니다. 서리꽃은 추워야 피는 꽃입니다. 다시 사진을 보며 만추(晩秋)의 서정을 마음으로 느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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