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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여행이다/중국&일본

화련(花蓮) : 태로각

by 훈 작가 2023. 12. 4.

오늘은 화련 일정 단 하나다. 가는 데만 3시간 걸린다. 같은 호텔에서 3일 묶으니 짐을 풀었다 다시 싸는 번거로움이 없다. 편안한 복장으로 시간에 맞추어 내려갔다. 먼저 내려온 일행과 아침 인사를 건넸다. 가이드가 말한 8시 20분에 우리는 모두 버스에 올랐다. 인원을 파악한 버스가 출발하자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조금 늦게 출발해도 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대만을 지나간 태풍으로 도로에 낙석이 떨어져 공사 중인 2곳이 일방통행이라 시간에 맞춰출발하지 않으면 대기하는 데 40분 이상을 길 위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란다. 9시에 출발해도 되는데 그 시간을 피하려다 보니 조금 일찍 출발한다는 게 가이드 설명이다. 

대만은 중국 본토의 남동 해안에서 160km 떨어진 고구마 모양의 섬으로 우리나라처럼 동고서저 지형이다. 면적은 약 35,000㎡로 경상남북도의 면적(32,000㎡)보다 약간 더 넓다. 북에서 남으로 높은 산맥이 있고, 해발 3,000m 산이 2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왕래가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고 한다. 지리적으로 지진과 태풍이 많은 자연환경이라고 가이드는 말했다. 


이어 태로각에 대해 언급했다. 장제스는 중국 본토와의 전쟁에 대비해 퇴각로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해발 2,000m의 험한 산악 지형으로 대리석과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화련 지역은 공사가 어려운 곳이다. 터널 공사도 많이 해야 하는 구간으로 태로각(太魯閣) 계곡은 20㎞에 이르는 대리석 협곡이다. 그는 5,000명의 죄수를 동원해 4년에 걸쳐 길을 완공시켰다. 장비 하나 없이 사람이 망치와 정만 사용해 단단한 대리석 암벽에 도로와 터널을 뚫었고, 이 과정에서 26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장춘사라는 사찰이 태로각 절경으로 꼽히는 곳에 있다. 특히, 제비집처럼 계곡절벽에 구멍이 뚫려 있고, 에메랄드빛 계곡이 펼쳐져 있는 연자구(燕子九) 계곡은 급류를 이루는 물의 마찰로 형성된 Pothole은 제비들이 둥지를 틀고 서식한다. 이곳은 소수민족 아미족의 근거지로 민속공연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어 대만의 이국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대만을 유럽에 처음 알린 것은 1544년 포르투갈의 선원들이다. 그들은 원주민들과 약간의 교역을 했다. 이후 1624년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대만에 들어와 남쪽 타이난에 요새(Fort Zeelandia)를 짓고 원주민을 다스리며, 남서쪽 지역을 개척해 설탕, 쌀, 후추, 비단 등을 교역했다. 당시에 중국 본토에서 생계를 위해 넘어와 사는 소수의 중국인도 있었다. 그 사이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의 시대가 열렸다. 이후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해 대만은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우리보다 15년 먼저 식민지가 된 셈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 육사 출신인 천이(陳儀·1883~1950)가 행정장관으로 임명되어, 그해 10월 일본의 대만 총독으로부터 공식적인 항복을 받아내고 대만인들의 환영 속에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당시 국민당 정부는 대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는 대만인들이 일제의 중국 침략에 협조한 잠재적 조력자 정도로 간주했다. 대만 정부의 요직은 대륙에서 건너온 이들이 대부분 차지했고 주민을 착취했다. 대만인들은 점점 국민당 정부에 대만 통치에 실망하고 배신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 당시 ‘개가 나가니 돼지가 왔다(狗去豬來)’라는 말은 민심이 어떠 했는지 말해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7년 2월 27일 비극이 벌어진다. 당시 정부의 전매품인 담배를 허가 없이 노점에서 팔던 한 여인이 경찰에 끌려가 폭력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민심이 극도로 안 좋은 상황에서 국민당에 대한 격렬한 항의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학생 한 명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음 날(2월 28일)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모여들면서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된다. 유혈진압으로 수만 명이 사망한 대만 역사상 최악이 비극이 바로 2·28 사건이다. 1989년에 발표된 허우샤오시엔(候孝賢) 감독의 영화 ‘비정성시(非情城市)’가 이 사건이 배경이 된 작품이다.

차창 밖의 풍경이 바뀌었다. 시가지 풍경 대신 울창한 숲과 산이 나타났다. 굽이굽이 산허리를 감고 잦은 곡선 도로를 버스는 거친 엔진음을 뿜어내며 달린다. 경사도 만만치 않은 고갯길을 몇 번이나 넘고 터널도 여러 곳을 지나갔다. 그러기를 반복하더니 차가 평야 제대로 빠져나왔다. 시골스러운 농촌 풍경이 펼쳐졌다.


가이드가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대만의 결혼 문화에 대해 입을 열었다. 남자들이 결혼하기가 한국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 남자들은 집만 준비하면 된다. 그러나 여기는 다르다. 결혼하려면 집은 물론, 살림살이에 처갓 집에 지참금(보통 2천만 원)을 주어야 한다고 한다. 여자는 약혼 준비만 하면 된단다. 남자들은 돈 벌어 생계를 책임지고, 여자는 자기가 번 돈은 자기가 쓰기 위해 쓴다는 게 가이드 설명이다. 

한국과 달리 음주문화도 별로 없고, 칼퇴근하며, 식사는 삼시 세 끼를 사 먹는다. 따라서 남자들은 버겁고 상대적으로 여자들은 살기 좋은 곳이다. 이런 배경에는 한국과 다른 결혼에 대한 다른 인식이 숨어 있다. 잘 키운 남의 집 딸을 데리고 간다고 하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남자가 부담하는 게 많다. 

한국에서 결혼식에 가면, 같이 가는 사람 수에 상관없이 상대방이 이전에 축의금을 얼마나 줬었는지 고려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축의금을 주는 게 일반적인 관례다. 대만에서는 나 혼자 결혼식에 가는 게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참여한다면 인원수를 고려해서 축의금(紅包)을 준비하고, 결혼식이 열리는 장소의 수준도 고려해 상대방(결혼 당사자)이 최소한 손해 보지는 않을 수준에서 축의금을 조정해 전달하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대만에서는 한국과 달리 여자 쪽 가족들과 약혼식을 먼저 하는데, 이때 손님들을 접대하는 비용은 여자 측에서 전적으로 부담한다. 신부 측은 ‘시빙(喜餅)’이라는 과자 세트(선물)를 하객들에게 돌리는 풍습이 있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남자는 결혼식 때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부담한다. 결혼식 당일 한국은 30분이면 모두 끝나는 데, 대만은 신부가 드레스를 3벌을 갈아입으면서 3시간 이상 걸린다. 이 과정에서 식사하면서, 게임도 하고, 파티형식으로 식을 진행하기 때문에 아주 친한 사람만 초대한다.


가이드가 대만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위가 있다며 빨간 봉투에 대해 말했다. 길거리에서 바닥에 떨어진 빨간색 봉투를 줍지 말라는 것이다. 그 안에는 여러 장의 돈이 들어있는데 횡재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름 끼치는 이유가 있다. 돈 말고도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손톱, 사주팔자가 적힌 종이와 사진이 함께 들어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과 손톱의 주인은 이미 유명을 달리한 ‘고인’이다. 

이렇게 길거리에 빨간 봉투를 버리는 것은 대만의 일부 지역에 남아있는 일종의 풍습이다.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가족에게 짝을 찾아 주기 위한 행동이다. 길거리에 빨간 봉투를 뿌린 유족들이 어디에선가 숨어서 누가 봉투를 집는지 지켜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 봉투를 줍는다면 가족들은 봉투를 주은 사람과 ‘영혼결혼식’이 이뤄졌다고 믿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 문화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가이드가 차창 밖을 보았다. 우리 시골의 읍내 같은 마을을 지나고 있다. 높은 건물이 안 보였다. 가이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5층 건물이면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 하므로 대부분 건물을 4층까지 짓는다고 한다. 그 말과 함께 마치 장난감 레고처럼 작은 석조 모습의 작은 집 모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을 가리켰다. 무덤이란다. 이곳 사람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영혼이 살 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덤을 집처럼 만든다는 것이다. 가만히 무덤 형태를 보니 대문도 있고 집 모양도 있다. 시계를 보니 호텔을 출발한지 1시간이 지났다. 가이드는 휴식을 위해 20분 뒤 휴게소에 들러 쉬었다 갈 예정이라 말했다.

휴게소를 출발하여 오전 11시경 한 식당에 도착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길 건너편에 한 과일 노점상이 보였다. 망고와 석과 등을 진열해 놓고 판다. 가이드는 주인이 직접 재배해 판매하는 거라 신선하단다. 다만, 투명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놓은 것은 사지 말고, 생과일을 사면 즉석에서 깎아 포장해 주니 살 의사가 있으면 그렇게 하란다.

 
11시 40분에 출발한 버스가 12시에 목적지인 태로각에 도착했다. 20분 남짓 걸렸다. 가이드가 일행에게 설명했다. 30분 정도 태로각 협곡을 걸을 예정이란다. 우리가 탈 버스는 내린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걸어서 도착할 지점에 미리 가 있을 거란다. 자신은 맨 뒤에서 천천히 걸을 것이라 했다. 혹시 길을 잃어 다른 곳으로 빠지는 일행이 있으면 문제가 되기 때문이라 말했다. 

설악산 같은 수려한 산세가 아니라 그냥 높은 산 깊은 계곡이다. 울창한 나무숲이 우리와 다른 산의 모습이다. 울창하다는 말보다 정글처럼 우거진 숲이다. 길은 골짜기로 구불구불 이어진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 하늘을 올려 보니 산봉우리에 구름이 걸려 있다. 산세가 그만큼 높다는 이야기다. 이런 곳에 도로를 낸다는 것은 한 마디로 무모한 결정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이곳은 대만에서 이름난 명소인가 보다. 몰려든 관광객들이 줄지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걸었다. 하지만 구경거리는 없다. 그냥 깊은 계곡 길을 걷는 것이다.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곳이 없으니 심심하다. 그 얘기는 사방 어디를 봐도 탄성을 지르며 감탄사를 연발할 만한 경치가 안 보인다는 뜻이다. 그래도 맑은 공기를 벗 삼아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가끔 스마트 폰을 들고 인증사진을 찍으며 여행을 즐긴다.

딱히, 그럴듯한 풍경이 없더라도 나는 연신 카메라로 여기저기 조각조각 태로각의 모습을 오려 담았다. 이렇다 할 사진 포인트도 없다. 걷는 일이야 날마다 하는 일과인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태로각에 대한 설명은 가이드로부터 다 들은 지라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사실 여행 오기 전 인터넷에서 여행 후기를 훑어보아 흥미가 덜 했던 것도 있다. 


12시 40분, 버스는 태로각 구름다리로 출발했다. 구름다리는 계곡과 계곡 사이를 연결한 만든 다리다. 구불구불 경사진 도로를 힘겹게 버스가 올라간다. 높은 구름다리에서 내려다본 태로각의 모습은 어떨까.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구름다리가 있으니 비슷할 것이다. 먼 거리가 아니지만 구름다리가 있는 곳이 높은 곳이라서 버스도 만만치 않게 힘이 드나 보다. 주차장까지 다 오르니 오후 1시 가까이 됐다. 

우리는 줄줄이 구름다리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가이드는 1시 40분까지 버스로 오라며 자유시간을 주었다. 40분이면 구름다리를 건너갔다 오는데 충분한 시간이란다. 그 말인 곧 눈요기할 만한 것이 없다는 얘기로 들렸다. 다시 걸어서 구름다리로 향했다. 구름다리 위를 걸으니 시원한 바람이 세게 분다. 


잠시 서서 아래를 보니 무릎이 떨린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별로였다. 다만,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떨렸다. 오늘 일정은 걷고 또 걷는 밖에 없다. 그나마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다. 비라도 왔으면 어쩔 뻔했겠는가. 그래도 그냥 가면 아쉬울 게 뻔했다. 카메라를 들고 계곡 아래 풍경을 몇 장 찍었다. 

다시 돌아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휴게소 건물 앞에 보이는 커다란 전나무 두 그루가 인상적으로 보여 마지막으로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화장실에 잠시 들렀다. 이제 화련(花蓮) 일정은 끝났다. 주변을 보니 일행이 안 보인다. 아직 10분이나 남았다. 주차장으로 오니 멀찌감치 차가 보인다. 앞에서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다.

버스에 오르니 벌써 일행이 거의 다 자리에 있다. 가이드가 인원을 파악한 후 버스를 출발시켰다. 이때가 1시 40분이다. 이제 타이베이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호텔로 가는 길에 청수단애(清水斷崖)를 잠시 들러 휴식을 겸해 구경하고 타이베이로 돌아갈 예정이란다. 청취 단애까지는 40분 정도 소요될 거란다


시원한 바다가 보였다. 보이는 바다가 태평양이다. 잔잔한 바다 풍경을 끼도 달리던 버스가 속도를 죽이더니 한 해변 가 언덕 주차장 쪽으로 들어갔다. 가이드가 말한 청수단애(清水斷崖)인가 보다. 차에서 내리니 바로 앞이 바다다. 화롄에 있는 절경 중 하나인 이곳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절벽의 멋진 풍경으로 대만 정부에 의해 '대만 8경' 중 한 곳으로 선정될 정도로 유명한 관광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그렇다고 하니 어쩌랴. 
절경은 아니지만 깎아지는 절벽과 바다가 만나는 풍경이 그런대로 멋을 뽐낸다. 위쪽에서 몇 번 셔터를 누르고 아래쪽 계단으로 내려가서도 몇 장을 더 찍었다. 그냥 멀리서 사진이나 찍을 수밖에 없다. 그림의 떡 같은 풍경이다. 


오후 2시 25분에 청수단애(清水斷崖)에 도착하여 15분 정도 머물렀다. 마치 고속도로 휴게소에 잠깐 쉬어가는 것처럼 다시 버스에 올랐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길은 재방송이나 다름없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무념무상의 표정으로 보다 보니 자꾸 눈이 감긴다. 버스 안에 있는 우리 일행 대부분이 그랬다. 

눈을 떴을 때는 바깥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비가 올 것 같은 날씨다. 거기에 퇴근 무렵인지 차들이 많았다. 잔뜩 흐린 날씨에 오가는 차량이 모두가 전조등을 켠 상태다. 하나둘 사선을 그으며 빗방울이 차창을 스치며 날린다. 일정이 끝난 상황이라 비 오는 날씨가 남 일이 되었다. 비가 오거나 말거나 마음은 편하다.


타이베이 들어서니 비가 거세다. 장마철 폭우처럼 요란하다. 호텔로 가는 길목에 코스트코가 보였다. 그곳을 보고 버스가 선회했다. 바로 호텔이 보였다. 아내가 아쉬운지 한마디 한다. 알았더라면 회원 카드를 가져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버스가 도착하니 호텔 직원이 우산을 들고 비에 맞지 않도록 일행이 하차할 때까지 도와주었다.

객실로 올라오니 오후 5시 20분이다. 모든 게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커튼을 열었더니 그사이 빗속에 움츠리고 있던 해가 나왔다. 햇빛이 있는데 비가 온다. 호랑이가 장가간다는 여우비다. 카메라를 꺼내 여우비 내리는 장면도 몇 장 담았다. 이후 여우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치지 않을 것 같던 여우비는 오후 6시가 다 되어서야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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