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hoto 에세이/감성 한 잔

가을을 타나 보다

by 훈 작가 2023. 12. 7.

하늘의 구름이 솜으로 보였던 어린 시절,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 수 없을까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시골마을에 드나드는 교통수단이 귀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시골 신작로(비포장도로)를 다니는 버스도 하루에 두 번 볼 수 있을까 말까, 하던 때였으니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이야기입니다. 버스가 한 번 지나가면 뽀얀 먼지가 구름을 만들듯 피어오르다 이내 사라지던 옛 풍경이 스쳐 지나갑니다.

늦가을 겨울 준비를 위해 어머니가 이불솜을 보자기에 싸 머리에 이고, 장날 솜을 타러 나서던 뒷모습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생소한 표현일 겁니다. ‘썸 타다’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솜 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을 겁니다. '타다'라는 동사가 들어가 있으니 비슷하게 보이지만 뜻은 전혀 다릅니다. 뭉쳐져 있는 오래된 솜을 다시 부드럽게 부풀려 만드는 작업을 일컬어 ‘솜을 타다’ 또는 ‘솜 타다’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말은 의외로 재미있습니다. ‘타다’라는 말 앞에 어떤 낱말이 오느냐에 따라 뜻이 확연하게 달라지니 하는 말입니다. 버스나 기차 같은 교통수단이 아닌 감정이나 느낌을 뜻할 때 ‘타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수줍음을 타다’, ‘봄을 타다’, ‘더위나 추위를 타다’가 있는가 하면, 거문고나 가야금 같은 악기에도 ‘타다’라는 표현도 있고, 흥부전에 흥부가 박을 타다 같은 표현도 있습니다.

예전엔 시장 골목 이불 가게에 ‘솜 탑니다’라는 문구가 대부분 붙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국어사전에서 사라진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이 표현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디지털 문명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날로그 시대를 거쳐온 아재 세대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 시절엔 요즘 같은 대형마트나 편의점 대신 재래시장이나 장날(5일에 한 번 열리는 시장) 그리고 구멍가게가 전부였습니다.


가을엔 구름도 운치 있게 보입니다. 사진을 취미로 하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갔을 겁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다 보면 별것 아닌데도 시선이 갑니다. 때론 사물에 감정이입을 하는 버릇도 생겼습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구름인데 풍경 속에서 추억 산책까지 하게 되니, 나도 모르게 감성 세포가 활성화된 모양입니다. 봄은 여자,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자들은 봄을 탄다는데, 그와 비슷한 감정일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바람이나 쐴까, 하고 나왔습니다. 언덕 위 소나무 한 그루와  젊은 연인, 그리고 하늘 멀리 날아가는 비행기가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그사이 몰려드는 구름까지 카메라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찍은 몇 장의 사진, 그 속에 솜이불 같은 구름이 잠든 먼 추억의 그림자를 깨운 듯합니다. 아마도 가을을 타나 봅니다

'Photo 에세이 > 감성 한 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채화(水彩畵) 같은 사진  (121) 2023.12.12
외로움과 이별하기  (100) 2023.12.10
그리움  (88) 2023.12.06
바람을 담다  (92) 2023.12.05
추워야 피는 꽃  (11) 2023.11.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