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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감성 한 잔

수채화(水彩畵) 같은 사진

by 훈 작가 2023. 12. 12.

수채화는 물감을 물에 녹여 그립니다. 물에 녹아들지 않으면 자신의 색을 그림 속에 드러낼 수 없습니다. 화선지에 들어가야 비로소 색으로서 존재감을 나타냅니다. 물론 채색 여부는 화가의 선택입니다. 화가의 영혼에 담긴 미학의 관점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물감의 운명입니다. 물감은 화가의 구애(求愛)를 끊임없이 기다리며 조용히 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물은 화가의 선택과 무관합니다. 수채화를 그리려는 화가에게 물은 평생 동반자나 다름없는 운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은 화가의 붓끝에 따라 선택된 물감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물이 물감을 아무런 조건 없이 품는 겁니다. 물감은 물을 만나는 순간 자연스럽게 색으로서 생명력을 얻어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물감으로서 정체성을 화폭에 드러낼 수 없습니다.


수채화를 그리는데 물은 산소 같은 존재입니다. 물감이 색으로서 생명력을 갖고 그림 속에서 숨을 쉴 수 있어야 그림이 생명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에 표현된 색이 일견(一見) 주인공같이 보이지만,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물입니다. 수채화의 본질이 물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음을 그림이기에 어디까지나 물이 보이지 않는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은 색이 없습니다. 물을 색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의 정체성을 색으로 정의한다면 답이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물은 색이 없으므로 색으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색의 세계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세계에서만 색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굳이 물의 색을 정의한다면 빛의 관점에서 말해야 합니다. 물의 색은 빛을 담을 때 보이는 색이 물의 색이 될 수 있습니다.


사진이나 그림이나 미학의 한 장르입니다. 미학은 문화생활의 한 축인 동시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활동입니다. 수채화는 물감과 물을 조화시켜 화가의 시각으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듯이 사진도 빛과 물을 조화시켜 수채화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차이는 붓이냐 카메라이냐 하는 도구의 차이일 뿐입니다. 

사실 그림에 대해 문외한입니다. 평소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진에 대해서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닙니다. 어쩌다 사진을 좋아하게 되었고, 취미로 즐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학의 개념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두지만, 전문가 수준에서 미학을 거론할 만한 수준이 못 된다는 것을 말해 둡니다. 그냥 즐기는 수준에서 만족하며 사진을 즐기고 있을 따름입니다.


수채화 같은 사진을 찍으려면 물이 있어야 합니다. 물이 있는 풍경은 주변에 많습니다. 물이 있는 풍경은 도심을 가로지르는 하천이나 강도 있고, 산이나 들에 있는 호수나 저수지도 있습니다. 물은 주변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담아냅니다. 때로는 물이 담아내는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가을은 수채화 같은 사진을 찍기 좋은 계절입니다. 

물이 빛을 담아낸 사진이 반영 사진이다. 잔잔한 물은 풍경을 있는 그대로 담습니다. 이를 카메라로 찍으면 데칼코마니 같은 사진이 됩니다. 반영 사진의 묘미입니다. 설령 물이 있는 풍경이라도 모든 걸 멋진 사진으로 담을 수는 없습니다. 출사 장소도 그렇고 날씨도 그렇고 사진 찍기에 적합한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가능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운도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난가을 선운사 계곡과 몇 해 전 백양사 쌍계루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갑자기 수채화 같은 느낌이 들어 두서없이 적어 보았습니다. 가을이면 가끔 출사지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보곤 했습니다. 정작 그때는 그림에 대해 무관심해 이런 글을 쓰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이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잘난 척한 것 같아 은근히 귀가 간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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