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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행복, 그대와 춤을

지워야 아름다운 사진

by 훈 작가 2023. 12. 20.

겨울 속에 들어온 풍경은 어느 것 하나 화려함을 뽐내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멋있다고 자랑해 보려고 해도 우아하지 않습니다. 예쁘게 단장하고 외출해도 회색 구름 속에 갇힌 태양은 늘 우울한 표정입니다. 그가 그렸던 가을은 낙엽이 지면서 다 지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아름답던 시간이 시나브로 스산한 풍경으로 바뀐 것입니다.

겨울 들판에 남아 있는 그림도 눈이 내리면 색이 지워집니다. 대신 바탕에 하얀 도화지만 도드라져 보입니다. 지워지지 않은 색은 검은색입니다. 그나마 동양화 같은 풍경이 자못 은은하게 우리의 마음을 힐링해 줍니다. 해마다 그랬듯이 겨울이 모질게 괴롭히고 풍경을 지워버려도 눈이 내리면 조금은 마음 포근해집니다.


세상은 일 년에 한 번은 지워야 다시 새로운 봄을 그립니다. 겨울은 태양도 붓을 내려놓고 잠시 동안거 같은 묵언수행의 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되돌아보면, 그도 모름지기 지쳐있을 겁니다. 계절마다 하얀 도화지를 채워야 했으니까 피곤했을 겁니다. 그래도 속세의 인연을 끊지 못하는 건 자연의 섭리이니 그도 뾰족한 수가 없을 겁니다. 

눈도 지우지 못한 세상, 그 안에 색이 보입니다. 밤새 지우다 못해 남아 있는 색, 검은색입니다. 세상은 그를 악으로 취급해 왔습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언론에 등장하는 표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검은 돈, 검은 유혹, 흑심(黑心), 흑역사, 검은 음모, 흑막같은 말이 대표적입니다.


눈이 지워 버린 겨울 풍경은 역설적입니다. 검다고 사랑받지 못했던 색이 오히려 돋보입니다. 사진은 빛의 미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겨울에 내린 눈이 다른 색은 다 지우고 검은색만은 지우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남은 풍경, 한 폭의 동양화 같은 풍경을 남겼습니다. 화려한 색의 조화가 아닌 단순한 흑백의 대비입니다.

지운다는 것은 단순하게 만드는 겁니다. 보여주고 싶은 주제를 강조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을 없애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인지 전문가들은 사진을 뺄셈의 미학이라고도 합니다. 눈이 지우개 같은 역할을 하면서 사진의 배경을 단순하게 만들고 나니, 사진 속의 피사체가 확연하게 눈에 드러납니다. 지우니까 보이는 겁니다.


세상살이도 비슷할 때가 많습니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일수록 단순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해법이 잘 안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핵심이 무엇인지 맥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장고 끝에 악수가 나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멋진 사진을 찍고 싶다면 지워야 합니다. 주제만 도드라지게 하는 겁니다. 이것저것 다 담은 사진은 시선이 분산됩니다. 가능하면 표현하고 싶은 것만 화면에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나 인생 여정에 아름다운 사진만 앨범에 남기고 싶어 합니다. 지우고 버려야 합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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