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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파티 : 나도 작가다/에세이

비 오는 날과 막걸리

by 훈 작가 2024. 2. 19.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어린 시절 궁금했던 게 있었습니다. 시장 골목 언저리를 지날 때마다 ‘대포집(표준어는 대폿집이지만 옛날에는 대포집으로 모두 표기했음)’ 또는 ‘왕대포집’이라는 간판이 도대체 뭘까, 도무지 이해 가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한두 집이 아니었습니다. 우스갯소리이지만, 그 시절에는 대포 한 대씩은 갖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냥 술집을 그렇게 부른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요즈음은 예전같이 않지만, 당시에 대폿집은 보통 막걸리를 파는 집을 뜻했습니다.

대포(大匏)는 큰 바가지라는 뜻입니다. ‘왕대포’는 ‘대포’에 왕자가 붙었으니 당연히 더 큰 바가지라는 뜻일 겁니다. 다른 ‘대포집’보다 더 큰 바가지로 술을 퍼 준다는 의미로 ‘왕’ 자를 붙였을 겁니다. 예전엔 술독에 있는 막걸리를 큰 바가지로 퍼서 주전자에 담았으니까요. 그 시절 서민들은 별다른 안주 없이 양재기로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하지만 어른들 말에 따르면 막걸리는 바가지로 마셔야 제맛이 난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막걸리는 비 오는 날이 제격입니다. 여기에 부침개나 빈데 떡이면 최상의 조합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유난히 입맛이 당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이는 기름에 지글지글 익는 부침개 소리가 마치 빗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고, 또 다른 의견은 밀가루에 들어있는 아미노산과 비타민B가 신진대사를 촉진해, 우울한 기분을 해소해 준다는 과학적인 설명도 있습니다.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지금도 생각납니다. 비 오는 날 파란 비닐우산을 쓰고 아버지 심부름 가던 그날이. 주전자를 들고 동네 어귀에 있는 양조장에 가면 막걸리 특유의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 당시 왜 어른들은 시큼한 냄새가 나는 막걸리를 마시는지 궁금했습니다. 무슨 맛일까? 주전자가 무겁기도 하고, 호기심도 발동해 참지 못하고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먹어 봤습니다. 시큼하면서 단맛이 났습니다.

한 모금 더 먹어 볼까, 하다 엄마한테 들키면 혼날 것 같아 그만두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형들도 있고, 동생들도 있는 왜 늘 나만 심부름시키지, 그게 불만이었습니다. 그땐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막걸리 주전자가 무거웠거든요. 그런데도 그런 불만을 한 번도 입 밖에 꺼내지 못했습니다. 해보았자 좋은 소릴 듣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 집 대문이 보였습니다.

시치미 뚝 떼고 주전자를 엄마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엄마가 저를 빤히 쳐다봤습니다. 이유를 몰랐습니다. 
“너, 한 모금 먹었지?”
“….”
“아버지가 드실 건데 다음부터 그러면 안 돼.”
엄마가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 곡할 노릇이었습니다. 
 

본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음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입에 댄 술이 막걸리였습니다. 이후 대학 인근의 대폿집에서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막걸리를 접하면서 어렸을 때 어머니가 어떻게 알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아마도 비 오는 날이라 막걸리 냄새가 내 입에서 났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는 주전자를 받아 들면서 막걸리 특유의 향이 내 입에서 나는 것을 눈치채신 것 같았습니다. 호기심에 맛본 어린 시절의 막걸리가 새삼스럽게 생각납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비 오는 날 막걸리를 즐겨 마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전철을 타면 막걸리 냄새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피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후, 막걸리를 마시면 어김없이 택시를 이용하곤 했습니다. 오늘도 비가 내립니다. 절기상으로 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우수(雨水)입니다.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온종일 오다 보니 대폿집에서 기울이던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납니다. 

대폿집은 희미한 추억이 된 지 오랩니다. 대폿집 대신 삼겹살에 소주 한잔이 어울리는 술집으로 바뀐 게 요즘 서민들의 술집일 겁니다. 세월은 대폿집 거리를 그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주전자에서 막걸리 한 모금을 빨아먹은 것을 알아채신 어머님은 요양원에 누워 계십니다. 더군다나 안타깝게도 자식을 알아보시지도 못합니다. 우울한 마음에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나는 비 오는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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