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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겨울꽃처럼 아름답게

by 훈 작가 2024. 2. 22.

이른 봄, 봄의 전령사로 노란 꽃을 피우는 꽃이 산수유입니다. 그냥 보면 몽글몽글 노란 꽃송이가 모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볼수록 달리 보입니다. 어찌 보면 앙증스럽고, 또 어찌 보면 노란 요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크기가 작고 예쁘기도 하지만, 향기도 그윽합니다. 

산수유는 한 송이에 여러 개의 꽃이 같이 피는 것도 특이합니다. 우산 모양의 꽃차례로 20~30개의 작은 꽃들이 뭉쳐서 핍니다. 꽃잎과 수술은 각각 4개 있는데 그모양이 마치 왕관을 쓴 것 같습니다. 많은 봄꽃이 그렇듯 산수유도 꽃이 잎보다 먼저 피며, 개나리꽃보다 더 일찍 핍니다. 

꽃이 청춘이라면 열매는 겨울은 노년에 해당할 겁니다. 꽃일 때가 아름답습니다. 사람도 청춘일 때가 아름답습니다. 민태원의 수필 ‘청춘 예찬’이 정치인의 ‘아무 말 잔치’처럼 툭툭 던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좋은 글이라고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황혼 예찬’이란 글을 본 적은 없습니다.

누군가 눈 속의 산수유 열매를 겨울꽃이라 쓴 글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상상해 보았습니다. 하얀 눈과 대비되어 빨간 열매가 어떤 풍경일지. 그래서 기회가 오면 눈 오는 날 산수유 열매와 어우러진 사진을 찍어 보고 싶었습니다. 과연 하얀 눈이 내린 날 산수유 나뭇가지에 매달린 빨간 열매가 ‘겨울꽃’이라 비유가 과장인지 아닌지. 

아파트 단지 길 건너 솔밭공원에 있는 산수유나무가 서너 그루 있습니다. 가을이면 빨간 열매가 요란하게 매달려 있는 걸 몇 번 보았습니다. 그때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진의 주제로 시선을 끌 만한 것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꽃도 고혹적인 매력이 없습니다. 겨울이면 열매도 쭈글쭈글해 볼품이 없습니다. 
 
그런 이유는 산수유 열매가 꽃이라는 표현에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니 딱히 이렇다 저렇다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이후 관심을 가지고 산수유꽃부터 카메라에 담아 보았습니다. 혹시 사진을 찍는 관점에 따라 멋진 산수유를 찍다 보면 산수유 열매가 겨울꽃이라는 이유를 깨닫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밤새 눈이 내린 다음 날 아침 카메라를 들고 솔밭공원으로 갔습니다. 다행히 눈이 제법 많이 내려 나무마다 눈꽃이 활짝 폈습니다. 산수유나무에도 가지마다 하얀 눈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줌렌즈로 화각을 바꾸어 가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보았습니다. 때마침 하늘도 눈구름이 물러간 상태라 색감이 좋았습니다.

사진을 찍고 보니 겨울꽃이라는 표현을 왜 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파란 하늘과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피어 있는데 다 빨간 산수유 열매가 멋진 앙상블을 이룬 모습이 정말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빨강, 파랑, 하양의 색감이 이렇게 멋진 조화를 이루다니, 전혀 생각하지 못한 조합이었습니다. 겨울꽃이라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겨울은 노년입니다. 때가 되면 눈이 내려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하고, 꽃 같던 얼굴도 젊음이 지워지게 됩니다. 아름답게 늙어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봐도 청춘의 모습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산수유의 겨울은 다른 것 같습니다. 청춘의 꽃이 져도 황혼의 꽃이 아름답습니다. 나도 겨울꽃 같은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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