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하니 보름달 보기는 물 건너간 듯 보입니다. 일기 예보로는 저녁에 비가 나릴 것이라는 보도도 있고, 어쩌면 구름 사이로 볼 수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정월 대보름에 대한 세시 풍속이 남아 있어 대형유통점 식품매장이나 전통시장 골목은 분주합니다. 땅콩, 밤, 호두 같은 부럼이나 고사리, 버섯, 호박고지, 무말랭이, 가지나물, 산나물 취나물, 시래기 같은 건나물을 사러 나온 주부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요즘은 산불 위험 때문에 논둑에 불을 놓는 쥐불놀이는 금지시킨 듯합니다. 예전엔 쥐를 쫓는 의미로 아이들이 논두렁이나 밭두렁에다 짚을 놓고 해가 지면 다 같이 ‘망월이야’ 하고 외치면서 불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깡통에 구멍을 뚫어 철사 끈을 달아 불쏘시개를 넣고 돌리면 놀면 윙윙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른바 쥐불놀이는 논밭의 해충과 세균을 제거하고 새싹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했던 세시풍속입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어른들과 마을 뒷산에 올라 달 보며 소원을 비는 거였습니다. 달이 뜨기 전에 부지런히 올라야 했습니다. 숨을 몰아쉬며 오르면 동쪽 산 능선에 보름달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며 올라옵니다. 대개 동네 어른들은 ‘올해도 풍년이 들게 해 달라’ 빌었고, 엄마들은 나쁜 일을 없도록 해달라 빌었습니다. 나는 그 옆에서 얼른 어른이 되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던 기억이 납니다.
농사일은 달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예로부터 민간 신앙에 빠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우리의 삶을 지켜주고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학창 시절 배운 백제시대의 가요인 정읍사(井邑詞)에 나오는 달도 그런 존재였습니다. 장사 떠난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여인의 간절한 마음이 달을 통해 나타냅니다. 여인은 애절하게 빌었지만,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아내는 망부석이 된 슬픈 노래입니다.
어릴 적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었던 소년은 소원대로 어른이 되었습니다. 다만, 소년의 소원대로 빨리 어른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세월이 생각보다 느리게 갔던 모양입니다. 학창 시절엔 늘 입시에 시달려 공부해야 했고, 대학 시절엔 또다시 취업과 진로 때문에 고민이 많아 낭만을 잃어버린 청춘을 보낸 것 같습니다. 소원을 이루었지만, 또 다른 소원을 정월 대보름날이면 빌어야 했습니다.
어른이 된 후 달라진 소원이 내 집 마련이었습니다. 내 집을 마련하지 못하면 결혼도 안 하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청춘을 다 바쳐 살았습니다. 너무 어렵다 보니 결혼도 포기해야겠다고 수없이 생각했습니다. 제 또래 친구들이 애를 낳고 사는 걸 보면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났습니다. 어떤 날은 술에 취해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때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어봤자 소용없다 걸 알면서도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지방 도시에 내 이름으로 된 조그만 아파트를 마련했습니다. 그때가 나이 마흔하나였습니다. 얼떨결에 노총각도 졸업했습니다. 지금도 대한민국 땅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요즘 젊은 세대를 보면 한편으로 안쓰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생에 정답이 없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다만 세상이 너무 서울이 중심이 되다 보니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젊은 날 내 집 마련의 꿈에 너무 집착한 내 자신을 후회한 적이 많습니다. 차라리 다른 그 꿈을 품었다면 인생이 확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낭만 없는 청춘을 다 보냈고, 사랑에 빠져 보지도 못했고, 하고 싶었던 모든 걸 포기하고 금욕적인 삶을 스스로 강요했던 지난날, 왜 그렇게 살았나 싶습니다. 누구든 지나고 보면 아쉬움과 후회가 남는 게 인생인가 봅니다.
정월 대보름달을 본다면 소원을 빌어보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러면 달님이 웃으시며 이렇게 혼을 낼 것 같습니다.
“어릴 적엔 빨리 어른이 되어 달라고 해서 어른이 되게 해 주었는데, 어른이 되니까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정말이야?”
“예, 달님.”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데, 다른 어른들도 너처럼 해 달라고 하면, 다 들어주어야 하잖아. 안 그래. 그렇게 되면 세상이 온통 아이들 세상이 되니까, 그건 안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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