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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사라진 풍경(4)

by 훈 작가 2023. 3. 12.

 

전월산 아래 옅은 안개가 깔려 있다. 발걸음을 옮겨 장남 들녘으로 가야 하는데 길이 없다. 불도저로 밀어 놓은 공사 현장은 온통 황톳빛이다. 울퉁불퉁한 공사 현장 끝머리에 서니 경사진 언덕 아래로 장남 들녘이 보였다. 모내기가 끝난 논길까지 내려가는가는 게 문제다. 길이 없는 40도 경사면은 온통 황토흙이다. 논까지 거리가 족히 20m 이상 되는 거리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발을 옮겨 내려갔다. 조그만 도랑이 가로막는다. 건너야만 논길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도랑은 어둠 속에 우거진 풀숲으로 덮여있어 물이 안 보인다. 졸졸졸 소리는 들리는데 말이다. 도랑 폭도 한걸음에 건너뛰기에는 넓다. 
 



어떻게 건너야 좋을지 살펴보았다. 도랑에 가로놓인 나뭇가지를 밟고 건너면 되겠다 싶었다. 그것을 밟는 순간 '뚝'하더니 부러졌다. 중심을 잃고 말았다. 넘어지면서 오른손으로 풀줄기를 잡았다. 하지만 한쪽 다리가 도랑물에 빠져 바짓가랑이가 엉망이다. 논 둑길에 서 있던 작은 고라니 한 마리가 나와 마주 치자 도망친다. 동시에 물오리 떼와 두루미 몇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졸지에 녀석들에게 불청객인 되었다. 미안해진다. 의도치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논길을 걸으며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옅은 안개가 전월산 아래 아직도 누워 새벽 단잠을 즐긴다. 여명이 퇴근하며 안개 위로 서서히 붉은빛이 물들어 간다. 고요 속에 들어온 영혼은 번뇌를 잊는다. 


고독이 주는 자유. 살아 숨 쉬는 행복을 만끽한다. 다시 만나는 기다림, 이제는 너무 익숙하다. 일출 전 하늘 처마 끝, 뜨거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심장은 설렘을 안는다. 짝사랑에 머물던 장남 평야 일출이 만나는 순간이다.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이 순간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연인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우정, 부부간의 금실, 내가 살던 고향. 하지만 변한다. 세월은 모든 걸 변하게 만든다. 세월의 주인처럼 행세하는 우리가 변화를 주도한다. 개발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우리는 그걸 정당화한다.

장남 평야는 세월 속으로 사라졌다. 사진 속 풍경은 이미 지워진 상태다. 그 자리에 세종수목원이 차지했다. 그곳에서 살던 금개구리, 고라니, 물오리 떼 등은 어디로 갔을까. 녀석들이 또다시 살아갈 전세나 월세는 얻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착한 주인이나 만났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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