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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여행이다/북유럽

게이랑에르 가는 길

by 훈 작가 2024. 3. 23.

비가 내린다. 노르웨이의 첫 인연이 비였다. 여행에서 만난 비는 반갑지 않다. 그래도 여행인지라 그땐 내색하지 않았다. 오슬로를 벗어나면서 빗방울이 굵어졌다. 애써 불편한 마음을 감추었다. 숙소인 와달(Wadal)에 도착해서도 그저 지나가는 봄비이려니 했다. 막연한 기대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일단 마음이 편했다.

 

야속하게도 다음 날 봄비는 그치지 않았다. 사실 걱정되었는지 새벽에 눈이 떠졌었다. 커튼을 거두어 보았다. 걱정이 현실이 될 것 같다. 실낱같은 기대가 실망으로 다가온다. 순간 잠자고 있던 체념이란 단어가 슬그머니 기어 나오더니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든다. 나는 그 녀석을 가슴에 안고 침대로 들어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비를 맞으며 투어버스에 오르자 인솔자가 최종 인원을 확인하고서  버스는 예정대로 출발했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우리 일행은 일심동체가 되어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더니 모두 부처님을 만나러 잠을 청했다. 나도 눈을 감았다. 꾸벅꾸벅 흔들리는 대로 차창에 기대어 마음을 접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래도 여행인데, 시간이 아까웠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언제 또 보겠는가. 속은 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차라리 눈요기라도 즐기자. 지금의 이 순간을 단 하나라도 더 눈에 담자. 그런 생각에 카메라를 꺼냈다. 달리는 차 안이라 사진 찍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 그때부터 셔터를 눌렀다. 

 

그림 같은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우거진 숲과 그 사이로 이름 모를 폭포들이 그림을 만든다. 게다가 산과 산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은 보기만 해도 힐링이다. 은근히 부럽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느낌으로도 풍요로움이 눈에 보인다. 자연 속에 깃든 전원의 아름다움은 삶의 여유와 행복이 이런 것이 아닐까 느껴졌다. 

 

어느 순간 초록의 봄 풍경이 사라졌다. 여름과 가을을 건너뛰고 겨울로 들어왔다. 고원지대 눈밭이 길게 이어졌다. 산 능선은 눈으로 덮여 있다.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라 믿기지 않았다. 시루떡 층처럼 쌓인 눈이 스쳐 지나간다. 계절은 5월이 분명한데 겨울을 만나다니 이 얼마나 신기한 풍경인가. 

노르웨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자연풍경인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더니 다시 겨울 터널을 빠져나와 봄 풍경이 펼쳐졌다. 차창 밖은 비와 안개가 어우러진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고원지대를 지나 천천히 내리막길로 내려가고 있었고 아스팔트 도로는 봄비로 흠뻑 젖어 있다. 자욱한 안개 때문에 카메라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노르웨이의 피오르드 절경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송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가  3대 피오르드다. 이 중에서 게이랑에르가 가장 화려한 비경을 자랑하는 곳이라고 가이드가 말했다. 하지만, 1년 중 5월 중순~8월 말까지만 여행할 수 있단다. 지리적 특성상 눈이 조금이라도 내리게 되면 게이랑에르 가는 도로가 통제되고, 대신 일정이 송네 피오르드로 대체된다고 한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는 노르웨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자연 비경이다. 당연히 기대가 크다. 그런데 가는 길목부터 짙은 안갯속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오리무중 같은 상황이다. 잠에서 깬 우리 일행들이 빗줄기는 가늘어진 것 같은데 안개가 장난 아니라며 한 걱정이다.

고원지대를 벗어나 내려가는 길이 지그재그 형태인 모양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쏠린다. 여전히 차창 밖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영화 ‘와호장룡’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하는 안개만 끝도 없이 이어진다. 투어버스는 안갯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들고 있다. 게이랑에르로 가는 길이 정말 만만치 않다.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지상으로 내려오듯 투어버스는 천천히 반복하며 S자 길을 계속 돌고 또 돌았다. 그런가 싶더니 어느 순간 신부의 하얀 드레스 끝자락이 보이는 것 같았다. 초록색 5월의 숲사이로 집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1,500m 고원지대에서 얼마 동안 내려왔는지 모르지만, 골인 지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안개 숲을 벗어나자 멀리 게이랑에르 마을과 그 너머로 피오르드가 보였다.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투어버스는 곧장 선착장 쪽으로 다가가 숨 고르기를 한다. 빙하가 만들었다는 피오르다가 보였다. 다행히 빗줄기는 많이 가늘어진 상태였다. 투어버스에서 내렸다. 상큼하고 시원한 게이랑 마을이 여행객들을 반긴다.

게이랑에르까지 오는 길은 우울했다. 봄비 때문이다. 차라리 자는 게 낫다 싶어 도중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고 마음을 바꾸었다. 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 듯 해 카메라를 들고 연신 셔터를 눌렀다. 제대로 찍힌 사진이 별로 없다. 알면서도 몇 장은 건지겠지 하고 시도했다. 무모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우리의 5월과는 사뭇 다르다. 시원하다 느껴졌던 공기가 조금 쌀쌀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날씨는 복불복이다. 그러나 여행자는 누구나 투어를 즐기기에 좋은 날씨이기를 바란다. 첫날 오슬로부터 오늘 게이랑에르까지 오는 동안 날씨는 그리 좋지 않았다. 곧 이어지는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투어도 도긴개긴일 것 같다.

 

누가 말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이 생각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 상황에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삶이란 어차피 시나리오 없는 한 편의 영화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이는 자세도 필요하다. 어쩌면 이 상황도 지나고 보면 여행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추억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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