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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라떼별곡

꽃과 열매

by 훈 작가 2024. 4. 11.

노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보였습니다. 온 동네가 노랗게 물든 구례 산동마을 풍경이 그랬습니다. 산수유는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입니다. 생강나무도 노랗습니다. 하지만 산속에 피니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산수유가 노랗게 물들었음은 울타리 밖에 봄이 왔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봄의 전령사라고도 합니다.

노란 요정처럼 핀 꽃도 꽃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어차피 꽃이 지면서 봄이 떠나면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져 갑니다. 꽃으로 머물러 있을 때만 사랑을 받습니다. 이곳 마을도 그럴 겁니다. 춘삼월 산수유 축제 때만 상춘객들로 북적이다 언제 그랬냐는듯 한적해질 겁니다. 사람들은 오로지 꽃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소담스럽게 춤추는 꽃들도 이젠 그걸 알 겁니다. 그윽한 향기라도 접하고 가면 덜 아쉬울 텐데 사람들은 그마저 외면하고 훌쩍 떠납니다. 이후 다시 산수유꽃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을이 되면 꽃보다 열매가 아름다운 것을 모르고 간 사람들이 서운할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화려한 단풍에 시선을 빼았겨버리니까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산수유나무를 보면 알게 될 겁니다. 꽃보다 열매가 매력적으로 보일수 있다는 사실을. 겨울이 되어 산수유 열매를 만나면, 정말 이게 산수유꽃이었어? 하고 놀랄 겁니다. 모든 꽃이 지고 없을 때, 마치 산타할아버지 복장을 하고 요정이 되어 매달린 열매를 보면 생각지도 못한 반전의 미학을 만나게 됩니다. 

나무는 꽃을 버리지만, 꽃은 사랑을 남깁니다. 나무는 꽃이 남긴 사랑을 절대 허투루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씨앗을 열매로 만듭니다. 우린 그걸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고 말합니다. 어디까지나 사람의 관점입니다. 사실 버림은 생존을 위함입니다. 버림이 사람에겐 매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건 사랑의 결실을 위한 선택일 뿐입니다 .

인생도 꽃입니다. 누구나 한 번은 꽃을 피웁니다. 그리고 잠시 꽃에 머무릅니다. 그런데 꽃에서 그대로 머물렀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꽃으로 남을 수 없는 걸 알면서. 모순 속의 삶이 인생입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을 비워야지 하면서도 실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욕망(desire)의 산물이니까.

꽃으로만 살고 싶은 마음, 그게 욕망입니다. 버리기 싫은 갈망입니다. 그런데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듯 욕망도, 갈망도 버릴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진 속의 산수유나무가 고운 열매를 맺듯이. 쥐고 있는 걸 버려야 또 다른 걸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미련도 아쉬움도 남기면 안됩니다. 그래야 또 만납니다. 삶의 인연은 그렇게 세월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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