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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에세이/행복, 그대와 춤을

꽃을 만나는 시간

by 훈 작가 2024. 4. 12.

기다림이 있습니다. 무엇을 기다리느냐가 설렘을 좌우합니다. 연인을 기다린다면 가슴이 뛸 겁니다. 하지만, 봄을 기다리는 설렘은 가슴을 뛰게 하지 않습니다. 딱히, 언제라고 정해진 정확한 시간도 없습니다. 게다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자고 약속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의 시간은 늘 그렇듯 무덤덤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오기 때문입니다. 나도 익숙한지라 그러려니 하며 기다립니다. 

만나자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기다립니다. 봄을 그렇게 기다렸습니다. 본래 기다림이란 말엔 즐거움이 있어야 이어지는 만남이 반갑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봄이 왔는지, 어느 날 보니 봄이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봄의 전령사라 부르는 꽃들이 하나둘 피기 시작하면서 우린 기다렸던 시간을 잊습니다. 분명 기다리긴 했었는데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봄을 그렇게 만나왔기 때문입니다.

봄을 기다렸는지 꽃을 기다렸는지 헷갈립니다. 봄을 기다리긴 했지만, 꽃을 더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봄이 내 마음을 알면 무척 섭섭해할 겁니다. 그래도 봄은 언제나 품에 많은 꽃을 안고 옵니다. 지난 3월엔 봄이 품에서 키워낸 온 화엄사 홍매화를 만나고 왔습니다. 설렘이 주는 황홀함에 행복했습니다. 홍매화도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으련만, 어디까지나 짝사랑이었을 겁니다. 홍매화는 지난 겨울 상처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꽃이 준 힐-링의 힘이었던 겁니다.

벚꽃은 춘 4월의 문을 열고 나옵니다. 이때쯤이면 많은 이들이 벚꽃을 찾습니다.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기다렸던 이들이 모두 꽃을 만납니다. 환호 작약하는 상춘객들은 기다렸다는 듯 꽃놀이를 즐깁니다. 봄나들이에 나선 사람들 틈에 끼어 벚꽃을 만났습니다. 꽃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긴 하지만, 많은 인파로 꽃과 만남이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힐-링의 감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벚꽃이 지니 또 다른 봄이 날 반깁니다. 주인공은 튤립입니다. 튤립의 아름다움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겁니다. 튤립의 아름다움은 사람의 마음을 은근히 무너뜨립니다. 튤립이 유혹하는 게 아닙니다. 튤립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튤립이 지닌 마력은 권력 같은 힘이 있습니다. 다가가려면 무릎을 꿇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튤립이 시들기까지는. 장미꽃이 피기 전까지 튤립은 여왕의 지위를 지키며 아름다움을 뿜어냅니다.
 
사람은 자연과 소통하며 살아야 존재입니다. 자연과 소통하면 행복이 있고, 힐-링이 있습니다. 자연 속엔 신이 만든 우주의 기운이 있습니다. 자연과 소통하고 대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꽃을 하찮은 존재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나무나 꽃들이 아무런 감정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겁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느낍니다. 렌즈를 통해 피사체를 담으면서 대화해야 한다고. 내가 널 예쁘게 담고 싶으니 날 좀 보라고. 특히, 꽃을 찍을 때는 다 가까이 다가가 다정다감하게 대화를 나눕니다. 꽃도 사랑받는 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꽃은 사랑의 힘으로 존재하고 숨을 쉽니다. 꽃도 생명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들만의 감정이 있습니다. 내가 널 사랑한다고 말할 때, 꽃이 더 환한 미소로 나를 바라봅니다. 그때 ‘찰칵’.

꽃을 만나는 시간은 꽃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내가 꽃을 사랑하지 않으면 꽃을 만나러 갈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꽃을 만나면서 무뚝뚝하게 바라만 보다가 올 수는 없습니다. 예쁘다고 말해주면 녀석은 미소로 내게 대답합니다. 꽃과 눈 맞추면서 한번 말을 건네면 예쁘게 찍어 달라고 앙증스럽게 나를 봅니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꽃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미친 짓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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